지난달말 서울 삼성동에 있는 한국벤처캐피탈협회 직원들은 일손을 잡지 못했다.

벤처캐피털 업계의 대부로 불리던 사람이 수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부터다.

"이럴 수가" "설마" 등으로 반신반의 하던 업계 관계자들은 결국 그의 구속 소식이 발표되면서 큰 충격에 휩싸였다.

한 창투사 관계자는 "벤처캐피털들이 코스닥침체 등으로 가뜩이나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제는 도덕성마저 의심받게 됐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의 걱정대로 이 사건은 곧 "벤처캐피털 비리"로 부풀려졌다.

"벤처캐피털의 간판스타가 그렇게 했다면 다른 벤처캐피털들도 마찬가지일 것 아니냐"는 여론이 들끓었다.

하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몰아붙여도 되는지.

기로에 선 벤처캐피털업체들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의미를 다시한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 벤처캐피털 없이는 벤처기업도 없다 =최근들어 실리콘밸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된다.

로젠컨설팅그룹 등은 현재 실리콘밸리 닷컴기업의 80%가 내년까지 사라질 것이라는 보고서도 냈다.

이와 맞물려 올 1.4분기 실리콘밸리에 유입된 자금은 27억달러로 지난해(1백41억달러)에 비해 80%이상 줄어들었다는 자료도 나왔다.

벤처기업이 제대로 된 실적을 내고 있지 못해 투자가 줄어든 것일까.

아니다.

벤처투자가 줄어 벤처기업들이 어렵다는 해석이 더 우세하다.

CNN은 "벤처캐피털들이 투자를 꺼리면서 자신들의 지원으로 설립된 기업들의 숨통을 끊어놓고 있다(pulling the plug)"고 보도했다.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벤처투자를 위한 창업투자조합(펀드) 결성금액이 지난해 4.4분기에 4천4백1억원을 기록했다가 올 1.4분기에는 1천2백23억원으로 급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미국 벤처캐피털들의 투자 자제가 수익성기준 등의 자체 판단에 의한 것인 반면 한국 벤처캐피털들은 내부적으로 투자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서학수 마일스톤벤처투자 사장)

<> 벤처캐피털을 죽이는 규제들 =벤처캐피털들의 지분매각을 제한하는 "로크-업"에 대한 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벤처캐피털 업계는 지난해부터 줄기차게 개선을 요구하면서 그 객관적인 논거를 제시해 왔다.

하지만 증권업협회측은 묵묵부답으로 성실한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무슨 근거로 벤처캐피털들만 지분을 팔지 못하게 하느냐"는 항변에 다만 "벤처캐피털들은 다른 금융기관 등과 다르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투자자금을 회수하지 못하면 신규 투자가 불가능한 것은 당연한 이치다.

재원을 조달해 벤처기업에 투자하고 다시 코스닥 등에서 회수해 재원에 충당하는 것이 벤처산업의 기본적인 영업행태인데 이 길이 인위적으로 막혀 있다.

결국 최종적으로 피해를 보는 곳은 벤처기업들이다.

특히 자금이 가장 필요한 걸음마 단계의 벤처기업에는 돈 줄이 아예 말라 버린 상태다.

"로크-업으로 투자자금 회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때문에 자금이 장기간 묶이는 초기 단계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다"(D창투 K심사역)

로크-업 외에 "벤처캐피털리스트의 투자기업 투자제한 등도 장기간을 바라보지 못 하는 근시안적인 규제"라고 이부호 벤처캐피탈협회 이사는 강조했다.

이로인한 투자위축은 3~4년 뒤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 기로에 선 벤처캐피털 =벤처캐피털이 투자에 나설 수 있게 북돋워 주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많은 전문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벤처캐피털 업계의 뼈아픈 반성과 새로운 가치관 정립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드림디스커버리나 밸류라인벤처 등 일부 벤처캐피털들은 본연의 업무인 벤처투자를 하지 않고 A&D(인수후 개발)의 주체가 되면서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다.

소수 주주들의 입장은 무시한 채 장기간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무한기술투자와 웰컴기술금융도 벤처캐피털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게 사실이다.

일부 벤처캐피털리스트의 모럴해저드도 반드시 근절되어야 하는 병폐다.

"로크-업"에 대해서도 왜 이런 제도가 생겨났는지를 겸허한 자세로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와관련, "벤처캐피털들은 자성의 노력을 기울여 새로운 투자문화를 정립해야 한다. 아울러 정책당국은 장기적인 시각에서 벤처사업 전체의 발전을 위한 정책마련과 제도정비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