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초 서울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평소 홍보에 무관심하던 이지디지탈의 이영남 사장(45)이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나섰다.

이날 행사의 주된 목적은 미국 ADC텔레커뮤니케이션즈와의 전략적 제휴 체결.ADC사의 통신네트워크장비인 라우터 및 SDU(서비스 전송장치)에 대한 기술이전 및 공동마케팅이 주요 내용이었다.

디지털 계측기 분야에서 명성을 쌓아온 이지디지탈이 인터넷 관련 장비업체로 "환골탈태"하는 순간이었다.

매출 1백40억원(99년)의 한국 벤처기업이 외형 2조2천억원의 ADC사와 당당히 손잡고 참단기술 및 마케팅 기법을 전수받기로 한 터라 한동안 벤처업계에선 화제가 됐었다.

"벤처업계의 여장부"로 통하는 이지디지탈(www.ezdgt.com)의 이영남 사장.ADC와의 제휴 사례에서 보듯 그는 사업과 관련해 통이 크고 거침이 없기로 정평이 나있다.

대기업 계열사를 인수할만큼 남자못지 않은 두둑한 배짱과 추진력도 갖추고 있다.

골프와 주량도 수준급이다.

"룸살롱은 사업하기 좋은 곳"이라는 그의 지론은 벤처업계에서 전설이 된지 오래다.

올해초에는 1백20여명의 회원을 둔 여성벤처협회의 회장으로 취임해 여성기업인들의 지위 향상에도 열정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 사장이 이지디지탈의 전신인 서현전자를 설립한 건 지난 88년."이 세상에 산업이 존재하는한 계측기산업도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엔지니어출신인 남편 장형서 사장이 제품의 개발및 생산을 담당하고 이 사장은 이 제품을 가지고 전세계를 무대로 마케팅을 담당했다.

에스키모인에게도 냉장고를 팔 수 있을 정도로 자신감에 차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하는 이 사장.마케팅에 있어 타고난 수완을 발휘하며 회사를 국내 최고의 전자 계측기 업체로 키워냈다.

첨단기술에 가려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제조업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 기업가의 뛰어난 마케팅능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기술력 때문이었다.

지난 99년에는 경쟁사인 LG정밀 범용계측기사업부문을 인수하는 과감한 승부수를 띄우기도 했다.

이 사장은 "당시 주위에서 만류가 심했죠.조그만 중소업체가 대기업 계열사를 인수하는게 무모해 보였나봐요. 하지만 자신있었습니다. 문제는 규모가 아니라 업체가 가진 잠재성이란 확신도 있었구요"

그의 믿음대로 주위로부터의 염려는 그저 기우였다.

이 사장만을 믿은 LG측의 고급연구인력이 그대로 이지디지탈로 넘어왔을 뿐만아니라 산업재산권 기술자료 거래처 등 무형의 자산도 일괄 양도 받았다.

이 회사의 해외거래처 면모도 뛰어나다.

계측기 부문에서는 미국의 시어스로벅 및 라디오샤크사 독일 콘래드일렉트로닉스 영국 로빈 일렉트로닉스 프랑스 쇼방 아르누사와 안정적인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히타치덴시 등 다수의 일본기업들도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 거래처 모두가 이 사장이 다리품을 팔아 확보했다는 것.그의 신뢰성과 당당함 알뜰함이 거래처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했다.

계측기 수출을 늘리기 위해 미국 LA지역의 한 기업을 인수,모로웨이브란 법인으로 바꾸는 등 마케팅 분야에 혼신의 힘을 불어넣고 있다.

올해 이 회사의 매출목표액은 3백30억원.이 사장은 "정밀계측기 분야에서 쌓은 탄탄한 기술과 영업력을 기반으로 멀티미디어 등 통신네트워크 장비업체로 비상해 나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02)587-9977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