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내믹한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영우통신 우병일 사장의 창업동기다.

그가 한발 앞선 기술을 무기로 성장해 올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우 사장이 창업한 때는 1995년.

삼성전자 통신연구소의 동료 연구원들과 함께 자본금 5천만원으로 시작했다.

교환기 개발경험을 버리기가 아까웠지만 고집하지 않았다.

이동통신이 활성화될 것을 확신한 그는 소출력 무선호출송신기를 첫 품목으로 잡았다.

국내 중소기업으로서는 처음 개발한 이 장비로 모토로라 삼성전자 등과 맞붙었다.

제2무선호출사업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아 2천여대를 납품했다.

여기서 번 돈이 다음 변신을 위한 종잣돈이 됐다.

우 사장은 무선호출기에 이어 PCS 시장이 뜰 것으로 간파했다.

1997년초 이동통신 중계기 개발에 착수했다.

"적당히 앞서 나가야 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는 우 사장은 PCS 중계기로 또 다시 대기업과 격돌했다.

"삼성과는 멀어지려고 했습니다. 대등한 경쟁자가 되려고 노력했지요"

우 사장은 "삼성에 의존했다면 하청업체로 전락했었을 것"이라며 "지금은 협력 파트너가 됐다"고 말했다.

중계기는 018(한국통신엠닷컴)에 납품되기 시작했다.

전국에 깔려 있는 PCS 3사의 중계기(19만8천여대)중 23%는 영우통신의 장비라는게 우 사장의 자랑이다.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말 양산을 시작한 레이저 중계기는 세계 처음 상용화한 기술이라고 말한다.

레이저 중계기는 설치비는 물론 유지보수비가 적게 들고 보안에 강하다는게 강점.

우 사장은 일본의 제2이동통신 사업자인 KDDI에 레이저 중계기 7백만달러어치를 수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그는 IMT 2000용 레이저 중계기도 개발, 세계 처음으로 3세대 이동통신 서비스를 시작하는 일본에서 먼저 검증을 받는다는 계획도 세워 놓았다.

그의 도전영역은 무선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작년 7월 신설한 데이터네트워크 사업부를 통해 유무선통신장비 제조업체로 거듭났다.

이 사업부는 ADSL(비대칭디지털가입자회선) 모뎀에 이어 지난해 11월 VDSL(초고속디지털가입자회선) 시스템을 개발했다.

VDSL 모뎀을 국산화한 기업은 있었으나 시스템을 개발한 국내기업은 영우통신이 처음이었다고 우 사장은 자신있게 말한다.

일본에서 시범서비스용으로 이 회사 VDSL 시스템을 쓰고 있다.

틈새시장을 노린 소형량 광가입자장치(FLC)도 조만간 시장에 내놓을 예정이다.

FLC는 광케이블을 가정에까지 깔기 어려운 현실을 감안해 광케이블을 전화선과 이어주는 장치.

대기업 아이템으로 영우통신은 소용량으로 차별화해 나간다는 전략이다.

이 회사가 줄기차게 기술개발에 나설 수 있는 것은 매출액의 10%를 연구개발에 투자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연구인력이 전체직원 93명중 40명이 될 만큼 연구인력 비중이 높은 것도 한 이유에 불과하다.

투명경영과 권한이양이 기술개발의 원동력이다.

우 사장은 1998년부터 회계감사를 자청해 받아 오고 있다.

모든 직원이 회사의 재무상태를 알 수 있도록 했다.

팀장 재량으로 의사결정을 하게 하고 사후결재받는 시스템을 정착시켰다.

이는 애사심을 불러일으켜 이 회사의 이직률은 제로에 가깝다.

지난해 3백17억원의 매출액에 62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한 이 회사는 올해엔 1천억원의 매출과 2백10억원의 순이익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오광진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