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명예회장은 방계기업을 포함해 모두 83개의 기업을 일궈냈다.

범(凡)현대그룹으로 불리는 이들 기업의 자산가치는 한때 2백조원에 육박하기도 했다.

이들 기업의 지난해 매출은 총 1백20조원에 달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업적은 스피드 경영에서 출발한다.

신속한 의사결정으로 항상 남보다 앞서갔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바로 그 스피드 경영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독보적인 경영자다.

정주영 회장은 의사결정을 미루는 적이 없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업은 품위서가 올라가는 그 즉시 가부간 결정을 내렸다.

정 명예회장의 의사결정이 얼마나 빨랐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현대전자의 반도체라인 증설 때의 일화다.

다음은 당시 결재서류를 들고 올라갔던 실무책임자가 전하는 얘기다.

태스크포스팀에서는 수십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타당성 보고서를 첨부해 정 명예회장에게 사업계획서를 올렸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보고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딱 한가지만 물었다.

"삼성은 어떻게 한데"

"삼성은 설비를 늘리기로 했답니다"

"그럼 됐어. 삼성이 오죽 잘 검토해서 투자키로 결정을 했겠나.
우리도 설비를 늘려. 내일 당장 확장공사에 착수해"

정 명예회장의 의사결정은 그 정도로 스피디했다.

최초의 선박수주는 더욱 더 드라마틱하다.

정 명예회장은 73년 백사장뿐인 울산 미포만의 사진 한 장과 5백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내밀고 26만t급 선박 2척을 수주했다.

조선소 건설을 위한 첫삽을 뜨자마자 수주에 나선 것.

조선소를 다 짓고 난 뒤에 일감을 따러 다녀서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 명예회장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 명예회장은 건설 자동차 조선 전자 백화점 금융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기업을 일궜지만 스스로는 ''건설인''으로 불리길 좋아했다.

아마도 늘 현장에 있고 싶어하는 기질과 해외건설이 현대를 키우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65년 태국에서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수주하면서 한국 건설업체로는 처음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개가를 올렸다.

70년대 오일달러를 앞세운 중동 건설붐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했다.

88서울올림픽 유치 성공과 남북화해의 물꼬를 튼 것 등은 고인의 또 다른 업적으로 남는다.

만년에는 금강산 관광사업 등 남북경협을 통해 통일의 디딤돌을 놓는 업적을 쌓았다.

김상철 기자 che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