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상징하는 거인이었다.

해방직후인 1946년 서울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던 그는 6.25 전쟁과 5.16 군사 쿠데타, 민주화의 봄, 문민정권 출범, 남북 화해시대라는 정치적 격랑의 한 가운데에서 기업인으로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그는 반세기동안 맨 주먹으로 기업을 일으켜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시킨 탁월한 경영인이자 북방외교의 한 축을 담당했던 민간 외교관이기도 했다.

사회복지 재단을 만들어 각 분야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회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는 60년대 중반 공업입국의 기치를 내건 정부의 4대 기획사업중 하나로 추진했던 조선분야에 과감히 뛰어들어 개발연대의 주역을 맡았다.

70년대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를 중동건설 신화로 뒤바꾸며 위기에 빠진 한국경제의 돌파구를 열었다.

현대건설이 77년 완공한 9억3천만달러의 주베일 산업항 건설 공사는 현대를 재계 랭킹 1위 기업으로 만드는 역할을 했다.

76년 현대자동차를 통해 포니를 해외에 첫 수출, 한국 제조업의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킴과 동시에 수출 드라이브를 이끌며 한국경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77년부터 10년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으면서 재계의 구심점 역할을 맡기도 했다.

글로벌화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친 90년대에는 "정치권을 직접 바로잡겠다"며 통일국민당을 창당, 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모험을 단행하기도 했다.

98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전개된 남북한간 극적인 화해무대는 정 명예회장의 적극적인 대북투자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노구를 이끌고, 직접 키운 소떼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서며 한반도에 새롭게 이는 평화공존의 시대를 예고했다.

한국산업 발전사의 산 증인인 그는 도전적 기업가 정신과 비범한 경영철학을 남겼다.

수많은 사업을 펼쳐가면서 보여준 모험심과 불퇴전의 용기는 뭇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74년 울산조선소를 건설하면서 배를 건조해 진수하는 세계 조선업계 사상 초유의 기록을 남겼고 84년에는 서산 천수만 간척사업 물막이 공사에 "정주영 공법"으로 불리는 유조선 공법을 시도, 성공시킨 것이 단적인 예다.

이처럼 도전을 기회로 만드는 탁월한 재질과 과감한 추진력, 뛰어난 사업적 수완과 탁월한 리더십은 이후 "정주영론"이라는 경영학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에게는 무슨 아이디어든지 사업으로 전환해서 이익창출의 기회를 마련하는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고 그러면서도 비용과 효율을 고려하는 기업가의 본질이 내포돼 있었다.

그는 항상 기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진정한 기업가정신을 발휘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파란만장했던 정 명예회장의 인생무대 퇴장과 함께 "개발연대의 한국경제사"도 한 장(章)을 접게 됐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