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사태 이후 외자를 가장 많이 끌어들인 그룹은 LG다.

LG는 총 65억달러의 외자를 유치,그룹 전반의 구조조정을 원활하게 추진하는데 성공했다.

LG는 이 과정에서 해외 유수 기업들과 굵직굵직한 전략적 제휴를 많이 성공시켰다.

특히 LG전자와 필립스는 액정표시장치 브라운관 등 주력 사업의 합작을 성사시킨데 이어 최근에는 디지털 TV부문의 제휴까지 추진하고 있다.

지난 99년에 진행됐던 LG와 필립스의 제휴 협상 전개 과정을 자세히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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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배의 격차=1999년 1월12일 LG 트윈타워 회의실. LG전자와 필립스 관계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마주앉았다.

양사의 TFT-LCD(초박막 액정표시장치)합작 협상이 시작된 것이다.

이날 초점은 LG전자가 갖고있는 LCD사업부문의 가치를 얼마로 평가하느냐에 모아져 있었다.

이미 필립스는 98년 5월께 5억달러의 가격을 제시해둔 상태여서 이날은 LG측이 가격을 부를 차례였다.

LG 권영수 재경팀장이 무거운 정적을 깨듯이 입을 뗐다.

"75억달러는 받아야겠습니다" 필립스가 처음 제시한 금액의 15배를 부른 셈이었다.

회의장은 일시에 소란스러워졌다.

필립스의 CFO(최고재무관리자)이자 협상단장인 프란츠 스파가렌은 격앙된 목소리로 LG측에 항의했다.

쌍방에 고성이 오가면서 협상은 엉망이 돼버렸다.

그로부터 두달 뒤인 3월 중순,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양측은 다시 마주앉았다.

이번에는 필립스측이 수정 가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제시 가격은 20억달러 이하로 LG측의 기대에 턱없이 못미쳤다.

LG측은 저녁 무렵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다음날 새벽 1시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당시 부채비율을 줄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립스와 손을 잡아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필립스 보다는 우리쪽이 훨씬 다급했지요.

필립스도 이 점을 간파하고 협상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돈되는 사업을 헐값에 넘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꼬를 튼 술자리=공항에 일찌감치 도착한 권영수 상무는 착잡한 마음에 담배만 피워댔다.

더 이상 가격 격차를 줄이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다른 제휴선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잠시후 공항에 필립스의 LCD사업담당 부장이 나타났다.

자신의 집으로 저녁 식사 초대를 하고 싶으니 같이 가자는 얘기였다.

두 사람은 그날 밤 독한 위스키를 비우며 실무자로서 인간적인 고충을 서로 토로하며 위로했다고 한다.

술자리가 밤 늦게까지 이어지며 예약 비행기도 놓쳤다.

알고보니 필립스도 LG외에는 별다른 제휴선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LG보다 덜 다급하긴 했지만 필립스도 LG와의 합작을 강력히 원하고 있다는게 감지됐다.

그날 "작은" 술자리를 계기로 양측의 대화는 재개됐다.

더이상 소모적인 "탐색전"을 벌여서는 안된다는데 공감대도 마련됐다.

양측은 두달여동안 일사천리로 협상을 진행시켜 신설 합작회사의 가치를 42억달러로 한다는데 합의했다.

<>필립스의 막판 흔들기=99년 5월8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구본무 LG회장,구자홍 LG전자 부회장 등은 오후 5시로 예정된 합작계약서 조인식에 앞서 필립스의 주요 생산라인을 느긋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가격 수준도 대체로 만족스런 수준이어서 지난 1년동안 쌓였던 긴장이 눈 녹듯이 풀어졌다.

그러나 LG측은 필립스가 마지막 "흔들기"를 준비하고 있는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후 3시쯤 구회장 일행이 타고가던 벤츠에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가격 산정에 문제가 있으니 협상을 다시 하자"는 전갈이었다.

조인식을 불과 2시간 앞둔 시점이었다.

LG측은 크게 당황했다.

구자홍 부회장은 고심 끝에 "조인식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협상을 하라"고 실무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구회장 일행이 도착한 조인식 장소(호텔)에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호텔은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당시 필립스의 코어 본스트라 회장이 직접 구회장 일행을 만찬장으로 이끌며 연신 "치어스(cheers)!"를 제창했다.

필립스 수뇌부는 협상을 막판에 틀어놓고도 짐짓 모르는체 하며 구회장 일행을 반겼다.

이미 같은 호텔 객실에선 양측 실무자간 치열한 협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마침내 필립스는 "1억5천만달러를 깎아주지 않으면 협상 결렬을 선언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했다.

최고경영자들이 만찬에 참가하고 있는 어수선한 분위기속에서 LG측은 엄청난 부담을 느꼈다.

단순한 가격 네고가 아니라 협상이 완전히 깨질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결국 LG는 필립스에 "굴복"했다.

1억5천만달러 때문에 40억달러를 놓칠 수는 없다는 현실적인 계산도 작용했다.

막바지에 터진 필립스의 강수가 먹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사실 적지에서 협상하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필립스는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1백% 활용했습니다.

한쪽에선 파티를 하고 또 다른 한쪽에선 협상 결렬을 내세워 압박전술을 편 것이지요"(권영수 상무)

<>반전 또 반전=계약서에 사인은 마쳤지만 LG는 역공을 준비했다.

마음 한켠에 "당했다"는 씁쓸한 기분을 안고 서울로 돌아온 LG 협상단은 절치부심했다.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시간이 없어 따지지 못했던 점들을 다시 되짚어보았다.

이 과정에서 필립스가 구사했던 "홈 어드밴티지"전략을 그대로 채용했다.

"이제 합작회사가 잘 돌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돈때문에 양측의 우호관계가 훼손돼서야 되겠느냐"는 "설득"과 "합작회사가 한국에 있다는 점을 잊지말라"는 "협박"이 병행됐다.

이번에는 필립스가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양측이 절충을 벌인 결과 LG는 필립스로부터 1억달러를 돌려받았다.

이같은 경험으로 서로의 성향을 파악하게 된 양사는 작년에 브라운관 합작도 비교적 무난하게 성사시켰다.

물론 서너차례의 결렬 위기를 겪었고 한 두차례의 승부수가 작렬하기도 했지만 대세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