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전은리스란 지방금융사를 놓고 인수경쟁을 벌이던 리젠트종금과 한미캐피탈 관계자들이 금융감독위원회 담당간부를 찾았다.

"우리끼리는 해결을 할 수 없으니 결론을 내달라"라는 주문이었다.

해당 간부는 "지금이 어느 때냐. 알아서들 하라"고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이들 업체는 "우리가 할수 있는건 다 해봤다. 이쯤 되면 정부가 어떻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오히려 금감위가 직무유기를 한다는 투였다.

관치금융에 반발하면서도 어려울 때면 항상 정부의 대책이나 지시를 바라는게 국내 금융기관의 현실이다.

남에 의존적인 ''피터팬 증후군''이 금융기관들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관치금융은 명분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시장이 방향을 잡지 못하거나 결정이 필요할 때엔 당국이 시장에 개입해야 하며 관치도 시장의 일부다"라는 정부의 변명이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은행 인사철만 되면 금융감독위원회나 재정경제부 등 금융당국 관계자들은 밀려드는 청탁에 곤혹스러워 한다.

각 은행마다 "누구는 청와대에 줄을 댔다" "모 국회의원과 친인척관계다"라는 소문이 난무한다.

외부에 인사청탁하는 것은 결국 은행의 경영자율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다.

관치금융을 거부한다면서도 은행원들이 스스로 관치금융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고 있다는 얘기다.

금융기관이 자율성을 상실한 모습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빛.평화.광주.제주 등 4개 은행은 지난해 3분기 보고서를 금융감독원에 제출하면서 순자산이 모두 플러스라고 공시했다.

하지만 곧 이은 11월 8일 은행 경영평가 결과 발표에서 이들 은행은 자산보다 부채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 완전 감자(減資.자본금감축) 조치를 당했다.

정부가 주도하는 금융지주회사로 편입되는 이들 은행은 앞다퉈 공적자금을 늘려 요청했다.

한빛은행의 경우 당초 은행 경영평가위원회에 냈던 공적자금 소요액 3조7천억원보다 1조1천억원 늘어난 4조8천억원을 달라고 손을 벌렸다.

영국의 유력 시사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한국의 은행들, 성공의 희생자''란 칼럼을 통해 "한국 은행장들의 행태는 대부분 관료적인데다 너무 자주 갖은 외압에 굴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고뇌만 할 뿐 용기는 없는'' 은행 문화가 관치금융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근영 금감위원장도 "그동안 국내 금융기관들은 ''관치금융''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퇴출위험 없이 비대해졌으며 이로 인해 수익성이 열악해졌다"고 말한 뒤 "이를 다시 경쟁력있고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 바로 금융구조조정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이종욱 서울여대 교수는 "관치금융은 관(官)의 변화만으로는 청산되기 어려운 복합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며 "금융기관들의 변신도 동시에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