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갑 LG화학 부회장의 승진 가도 뒤편에는 잊혀지지 않는 고난과 역경의 순간들이 많다.

그 중에서 그가 건물용 바닥장식재 "럭스트롱"을 개발해 적자사업부를 흑자로 탈바꿈시킨 얘기는 아직도 LG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1980년 프라스틱2사업부장 시절이었다.

"럭스트롱" 개발 임무를 맡은 그는 미국 암스트롱사가 기술을 건내 주지 않자 난관에 봉착했다.

"어떻게 합니까. 자체 기술로 개발해야지요. 그 당시 거의 매일 청주공장으로 내려가 실험에 매달렸지요"

그는 잦은 청주공장 출장으로 운전사를 고생시키는 것이 미안해 몰래 용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공장에 내려 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험은 쉽지 않았다.

암스트롱사가 기술을 내주지 않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

연 이은 실패에 그는 눈물도 적지 않게 흘렸다.

하지만 실패는 그의 오기를 발동시켰고 그래서 더욱 실험에 매달리게 됐다고 한다.

2년간의 가시밭길 연구끝에 "럭스트롱"은 1982년 상품으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소비자들의 반응은 무척 좋았다.

40억원에 달했던 사업부 적자가 일순간 흑자로 돌아섰다.

성 부회장을 최고경영자 반석위에 올려 놓은 것은 1989년 신설된 락희석유화학(현 LG석유화학)의 사장에 임명됐을 때다.

그는 당시 최대한 빠른 시간내에 나프타분해시설(NCC)을 완공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지금 공장이 들어선 전라남도 여수 용성단지는 당시만해도 절반은 바다,절반은 개펄이었다.

그는 그 곳을 "어머니 젖줄 같은 땅"이라고 부를 정도로 화학공장 부지로는 적격이라고 보았다.

문제는 그 곳에 살고 있는 6백30가구의 주민들이었다.

주민 이주는 정부가 나서더라도 쉽지 않은 일.

그는 새 주거지역으로 시내에 가구당 80평씩 부지를 마련했다.

그리고 집집마다 일일이 방문해 주민들을 설득했다.

일부 주민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골목마다 아스팔트를 깔아주는 등 배려를 해 결국 전 가구를 이주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가 간단치 않아 공기 단축이 쉽지 않았다.

그는 90년 5월 바닷가 현장에 캠프를 마련하고 인부들과 숙식을 함께 하며 건설을 지휘했다.

그가 직접 장화를 신고 뛰어들자 인부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땀을 흘리며 동참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당초 예상했던 기간의 절반인 1년6개월만에 공장을 완공하는 기록을 세웠다.

김성택 기자 idnt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