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경제부 K서기관.

행정고시에 합격해 지난 85년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요즘 왜 공무원이 됐는지 후회스럴 때가 많다.

예전처럼 공무원으로서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누리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다.

본부 과장 명함이라도 얻기 위해선 기라성같은 선배들을 제쳐야만 한다.

그래서 그는 벤처기업행을 고심하고 있다.

K씨처럼 고민하는 공무원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민간기업에 다니는 샐러리맨 입장에서 보면 "행복한 고민"이다.

K씨와 대학동기동창인 P씨는 명예퇴직을 신청하느냐 마느냐로 요새 밤잠을 설친다.

다행히 명예퇴직 대상자가 되지 않더라도 언제까지 버틸수 있을지 의문이다.

게다가 지난해말 연봉협상을 하면서 봉급마저 10%가량 깎였다.

민간기업에 비춰 볼때 공무원들의 철밥통은 여전하다는 평가가 주류다.

신분보장제에서 잘 드러난다.

큰 잘못만 없으면 법으로 정해져 있는 정년(5급이상 60세, 6급이하 57세, 기능직 57세)까지 일자리가 보장된다.

명예퇴직제가 도입됐다지만 민간기업과 달리 유명무실하다.

일본이 최근 신분보장제를 없애기로 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특히 고시제도는 연공서열의 계급제적 전통과 획일적.수직적 행정문화를 만들면서 관료사회를 동맥경화증에 걸리게 하는 주범이다.

오철호 숭실대교수(행정학)는 "고시제도는 과거엔 우수인재를 뽑는 훌륭한 수단이었으나 이젠 그 효용가치를 잃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3월 도입한 개방형 임용제도 역시 취지는 좋지만 아직 "성공했다고 보긴 어렵다"(참여연대 김기식 정책실장)는 평가가 많다.

현재 개방직으로 운영되고 있는 자리는 기획예산처 정부개혁실장, 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장 등 39개 정부기관에서 1백31개다.

실제 개방직으로 선출된 사람은 81명, 이중 순수 민간인은 12명(14.8%)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공무원 출신이 차지했다.

국세청은 지난해 8월 서울지방국세청 납세지원국장 등 5개 개방직을 공모했으나 외부 응모자가 없다는 이유로 전직 국세청 간부가 모든 자리를 차지했다.

재정경제부는 최근 국제업무정책관, 행정자치부는 인사국장을 공개모집하고 나섰지만 벌써부터 공무원 출신이 옷만 바꿔 입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개방직이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로는 관료사회의 폐쇄성이 꼽힌다.

우수한 민간인이 들어가더라도 부하 직원들이 따라주지 않으면 일을 할수 없다.

개방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L국장은 "일부 부처에선 "왕따"를 당하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개방직의 봉급도 민간에 비해 적어 우수한 인적자원을 유인할 힘이 크지 않다.

개방직 봉급은 민간인이 채용될 경우 같은 직급 공무원의 25%정도,

공무원이 개방직에 앉으면 월 40만원의 수당을 더 받는다.

민간에서 억대를 받는 우수인재를 끌어들이기엔 역부족이다.

게다가 3년간만 임기가 보장돼 있는 까닭에 우수한 민간인들이 개방직에 응모하기를 꺼린다.

공기업 임직원들이 준(準)공무원 신분으로 또다른 철밥통을 향유하는 것도 문제다.

낙하산으로 내려온 공기업 최고경영자들은 경쟁력을 높이기보다는 재직기간에 말썽없이 편안히 지내는게 관심사다.

그래서 임직원들에게 선심쓰듯 회사 예산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감사원 감사결과에 따르면 한국마사회는 시설관리 등 전체 직원의 42%인 기능직에 대해 일반직과 동일한 호봉체계를 적용, 1인당 평균 3천3백만원의 연봉을 지급했다.

산업자원부 공보관을 지내다 연우엔지니어링 사장으로 변신한 김정곤씨는 벤처행 이유로 "변화의 물결에 적극 동참하고 싶어서"라고 밝혔다.

관료사회가 그만큼 답답했다는 말이다.

나성린 한양대 교수(경제학)는 "고시를 철폐하고 각 부처에 공무원 선발권을 주는 등 공무원 임용제가 좀더 개방적이고 신축적이 돼야 한다"며 "공무원 보수도 현행처럼 일률적으로 할게 아니라 능력에 따라 민간부문과 경쟁할수 있도록 차등화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현철 기자 hc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