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세 < 이노디자인 대표 >

디자이너도 그림을 그린다.

화가의 그림은 철학을 담아내지만 디자이너는 아이디어를 그린다.

아이디어가 그려진 디자이너의 그림들은 복잡한 디자인-엔지니어링-제조-판매 등의 과정을 거쳐 소비자들 앞에 제품으로 나타난다.

그 그림의 주제가 냉장고와 같은 가전 제품이든 휴대용 전화기와 같은 정보통신 제품이든 또는 일반 제품이든 소비자들이 사용하는 각종의 상품들은 바로 이 그림으로부터 시작되어 만들어진 것들이다.

소비자들은 제조업체에게 상품의 값을 치르고 제조업체는 디자이너에게 "그림" 값을 지불한다.

결국 소비자들이 물건을 살 때마다 디자이너의 그림도 함께 사는 것이다.

디자이너로 활동해온 필자의 지난 20여 년을 돌이켜보면 이 그림 팔기의 세월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 아침 이른 커피숍에서 급히 그렸던 스케치의 값어치는 장차 얼마나 될 것인가.

디자이너의 벤처는 그림으로 시작된다.

오늘도 다른 날처럼 로스알토스의 집에서부터 팔로알토의 이노디자인 스튜디오까지 오는 동안 이런저런 궁리를 했다.

회사에 도착해 e메일을 점검하자마자 나는 길 건너의 커피숍을 찾았다.

물론 회사 로비에도 커피 바가 있지만 나는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스타벅스 커피숍을 즐겨 찾는다.

북적대는 사람들 속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머리로는 벤처를 시작한다.

이렇게 골몰하는 동안 때로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때 디자이너는 무슨 수가 있어도 이 아이디어를 "그려야"한다.

종이와 펜을 준비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면 옆 사람이나 카운터에게 부탁해서라도 그것을 꼭 그려야 한다.

그리면서 또 생각해야 한다.

그림은 꼬리를 물고 생각과 같은 속도로 종이에 그려진다.

아니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다고 하는 편이 옳다.

머리 속에 숨어 있던 아이디어가 종이 위에 모습을 갖춰 드러났으니 말이다.

이렇게 디자이너는 아이디어를 그려 나간다.

이 그림(아이디어)대로 제품이 만들어진다면 소비자들이 편리해짐은 물론 제조업체가 히트 상품을 만들게 될 것은 분명하다.

오늘 아침 커피숍에서 그려 자켓의 안주머니에 깊숙이 넣어 둔 이 그림도 엄청난 부를 창조할 수 있다.

복잡하고도 험난한 두 고개를 넘은 뒤에 말이다.

그 첫째 고개는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고 또한 그 대가를 인정할 줄 아는 기업을 찾는 일이다.

그 업체가 어떤 나라에 존재하는지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정직한 업체인지 여부를 알아내는 일은 매우 중요하며 또한 쉽지가 않다.

디자인은 무형의 지적 자산인 동시에 디자인 그 자체의 자산 가치를 정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디자이너의 머리 속에 담겨 있는 자산의 가치가 제3자에게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기업이 새로운 디자인을 찾을 때도 신뢰는 중요하다.

만약 그 기업이 반드시 제품을 만들려는 의지를 갖지 않았다면 비록 디자이너에게 "그림" 값은 지불될지라도 귀한 아이디어는 썩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때로는 디자이너가 기업을 신뢰하여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안했다가 지적 자산과 창의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무지한 기업에 의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도둑맞는 경우도 생긴다.

무형의 것을 훔치는 것엔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고질 때문이다.

두 번째 고개는 그림으로 표현된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를 실현해내는 과정에 있다.

같은 화가의 그림이라고 값어치는 천차만별로 다를 수 있듯이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도 실현 여부에 따라 값어치가 극과 극을 달릴 수 있다.

아무리 무한한 가치를 지녔더라도 실현시키지 못한다면 아이디어란 아무 값어치도 없는 한낱 공상이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닌다.

디자인은 아이디어를 그려내기도 하지만 또 그 아이디어를 현실화함으로써 진정한 가치를 구현하는 강한 힘을 갖고 있다.

아이디어를 그려내고 또 현실화하는 작업에 20여 년을 살아왔지만 아직 성공률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기업과 디자이너의 상호 신뢰와 존중만이 이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

나는 하루라도 그 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ceo@designatoz.com

...............................................................

[ 약력 ]

<>현 INNODESIGN, DesignAtoZ.com 대표
<>1974년 서울대학교 응용미술학과 졸업
<>1978년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산업디자인과 석사
<>1980년 미국 일리노이대학교(Univ. of Illinois) 산업디자인과 교수
<>1984년 미국 (주)ID FOCUS 설립
<>1985년 미국 (주)INNODESIGN 설립
<>1997년 (주)이노디자인 한국지사 설립
<>2000년 (주)DesignAtoZ.com 설립 수상
<>1990년 IDEA Award 동상 수상/ 미국산업디자이너협회(IDSA)
<>1991년 "베스트 프로덕트 1990" 선정/ 미국
1991년 일본 "GD" 마크 획득
<>1993년 IDEA Award 금상 수상/ 미국산업디자이너협회(IDSA)
1998년 한국산업디자인상 대상수상/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KAID)
1999년 한국산업디자인상 대상수상/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KAID)
2000년 IDEA Award 은상 수상/ 미국산업디자이너협회(IDSA)
2000년 "베스트 프로덕트 2000" 선정/ 미국
<>저서 2000년 , 디자인하우스 2000년 <디자인이 기업을 죽인다>, 중앙 M&B(2001년 2월 출간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