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강국 일본이 좌표를 잃고 방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정부와 정당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추락하고 서민들은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있다.

경제는 불황터널을 빠져 나오는가 싶더니 미국증시 침체라는 역풍 앞에서 다시 비틀거리고 있다.

부진한 개인소비가 경제회생의 걸림돌이라는 반성의 소리는 높지만 내일에 대한 불안으로 소비자들은 여전히 지갑을 열지 않고 있다.

21세기 첫해 일본은 어디로 가는가.

일본이 안고 있는 오늘의 문제점과 내일을 조명해 보기 위해 일본의 유수 연구소중 하나인 덴쓰총연(電通總硏)의 후쿠가와 신지(69) 소장을 만났다.

덴쓰총연은 일본의 초대형 광고 및 리서치업체인 덴쓰가 운영하는 싱크탱크로 경제 사회 등 각 부문의 현상과 의식변화에 관한 심도있는 연구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 만난 사람 = 양승득 도쿄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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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는 정당과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과 불신이 구미 선진국들보다 훨씬 심각하다.

왜 그런가.

◆ 후쿠가와 소장 =근본적인 원인은 정치가들의 리더십 부재에 있다.

구미 선진국에서 정당 정치가들에 대한 불신도가 50% 정도에 그치는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이 비율이 80%를 상회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의 배경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무엇보다 정책형성 과정에서 미래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불투명과 담합 흥정으로 얼버무려 온 것이 큰 원인이라고 본다.

국민들은 나라살림과 국가운영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공개되고 있다고 보는 비율도 지극히 낮다(1999년 4.3%).

정부는 정보화 혁명이 급속히 진전되면서 국민들의 욕구는 커지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음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 일본에서도 시민단체 등 비정부조직과 젊은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후쿠가와 소장 =정치개혁을 바라는 주장이 강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자민당 등 정당 내부의 관료적 색채가 너무 강해 이들의 요구를 정책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정보통신 혁명이 가져다 준 e데모크라시 시대에는 유권자와 정치인들이 직접 접촉할 기회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목소리를 외면해서는 설 땅이 없어진다.

- 교육의 질, 학력 저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일본의 교육이 왜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는가.

◆ 후쿠가와 소장 =일본은 지금까지 초.중등교육에 관한 한 구미 선진국을 능가한다는 평을 들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중.고생들의 추리력이 떨어지고 수학같은 과목도 다른 나라들에 뒤지고 있는게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이 학교간에 경쟁을 시키지 않아서 생겼다고 본다.

문부성이 모든 것을 쥐고 획일적으로 적용시키다 보니 개별학교 차원의 개성있는 교육이 불가능해졌다.

교장에게 교사 임용권 등 권한을 폭넓게 부여하고 우수한 교사를 뽑아 양질의 교육을 자기책임하에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 2000년은 일본 기업들이 소비자들로부터 유독 욕을 많이 먹은 한해였던 것 같다.

우유 집단식중독사건도 그렇고, 자동차리콜 은폐사건도 있었고….

◆ 후쿠가와 소장 =기업범죄와 기업윤리가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올해만이 아니다.

그러나 가장 주목하고 싶은 것은 버블경기가 한창이던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를 거치면서 일본 기업들의 윤리의식이 급격히 퇴조했다는 점이다.

주가와 땅값 상승의 단맛을 한번 경험해본 때문인지 직접 법에 저촉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수익을 위해서라면 괜찮다는 ''적당주의''가 기업들에 침투된 것이다.

이는 버블경제가 남긴 아픈 상처이지만 굉장히 유감스럽다.

앞으로 정보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업들도 클린 경영, 투명 경영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 21세기에도 일본 기업들이 과거와 같은 경쟁우위를 계속 유지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 후쿠가와 소장 =일본 기업들은 상품을 만드는 데는 강해도 소프트웨어에는 약하다는게 국제 산업계의 공통된 지적이었다.

과거와 같은 경쟁우위를 그대로 유지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도 새로운 경쟁우위 분야는 계속 나올 것이다.

단순히 상품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상품에 지혜, 부가가치를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경쟁우위를 지켜 나가려 할 것이다.

정보통신만 하더라도 인터넷 보급에서는 일본이 미국 한국에 뒤져 있지 않은가.

그러나 휴대폰을 이용한 무선인터넷에서 보듯 일본 기업들은 새로운 부가가치와 아이디어를 결합시키면서 또 다른 경쟁력을 갖춰 가고 있다.

- 불도저식 리스트럭처링으로 적자 수렁에서 벗어난 닛산자동차의 변신을 놓고 일본 재계에서도 찬반론이 엇갈리고 있다.

◆ 후쿠가와 소장 =대량 감원을 주저하지 않은 닛산자동차의 카를로스 곤 사장의 경영스타일에 대해서는 여러 시각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곤 사장은 여태껏 닛산자동차의 선배 사장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한마디로 일본인 사장들이 못하니까 외국인 사장을 영입했던 것 아닌가.

엄밀하게 말하면 곤 사장의 개혁은 지금부터 진정한 시험대에 올라있다.

닛산이 원가절감, 경영혁신에는 성공했지만 그동안 닛산의 일본시장 점유율은 계속 하강곡선을 그려 왔다.

닛산자동차가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했기 때문이다.

닛산 변신의 진정한 열쇠는 팔리는 자동차, 소비자들이 찾는 자동차를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에 달려 있다고 본다.

- 개인소비의 부진이 일본 경제회복에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인가.

◆ 후쿠가와 소장 =하시모토 내각이 1997년 소비세율을 3%에서 현재의 5%로 올린 것이 소비위축을 가속화시켰다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나는 2%포인트 세율인상이 소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는 보지 않는다.

기본적인 문제는 일본 국민들이 장래와 노후에 대한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령화 현상도 한 원인이 되고 있지만 정부의 재정적자가 누적되면 이로 인해 연금이 파탄상태를 맞게 될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노후 의료비 부담, 그리고 재정적자를 채우기 위한 증세에 대한 우려 등이 소비자들로 하여금 지갑을 마음놓고 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일본은 현재 1천3백90조엔에 달하는 금융자산을 보유하고 있고 연령별로도 생활비 부담이 적은 70대의 평균저축이 가장 많은 데도(약 1천6백만엔) 소비가 풀리지 않는 것을 보면 장래에 대한 불안이 무엇보다 큰 원인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고령화 사회의 진전이 일본의 경제활력에 마이너스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대책이 있다면.

◆ 후쿠가와 소장 =현재 일본의 출생률은 1.1%로 태평양전쟁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추산으로도 일본은 급속한 고령화 현상이 국내총생산(GDP)의 0.6% 정도를 끌어내리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2020년의 GDP는 고령화로 14% 낮아진다는 전망치도 나와 있다.

심각한 일이다.

대책은 우선 젊은 부모들이 육아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도록 정부가 각종 지원책과 시설을 늘려 출산의욕을 북돋아 주는 것이다.

외국 인력을 받아들이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고급 기술인력에 한해 열려 있는 문호를 일반 노동자들에게도 확대하고 이민을 받아들이는 것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 일본을 보는 다른 나라들의 시선이 1980년대와 같지 않다.

국가경쟁력은 매년 떨어지는 것으로 나오고 일본 국민들은 장래 나라가 좋아지리라는 기대도 별로 갖지 않는 것 같고….

◆ 후쿠가와 소장 =아픈 현실이긴 하지만 맞는 지적이다.

스위스의 세계경제포럼은 일본의 국가경쟁력을 1999년의 14위에서 2000년에는 21위로 7단계나 떨어뜨렸다.

일본 국민들 사이에 자신감과 희망이 엷어지는 것도 큰 문제다.

덴쓰총연이 매년 실시하는 가치관국제조사를 보면 ''앞으로 10년후에 나라가 지금보다 더 좋아질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미국인들의 59.5%가 ''그렇다''고 답한 반면 일본에서는 이 비율이 34.6%에 불과하다.

- 그렇다면 매력있는 국가, 희망이 넘치는 나라를 만들려면 일본 정부와 국민은 어떻게 해야 된다고 보는가.

◆ 후쿠가와 소장 =1980년대에 쌍둥이 적자로 신음했던 미국이 화려하게 부활한 배경에는 ''강한 아메리카, 강한 달러''를 실현시키자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

일본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창조적 혁신을 위한 노력, 한번 해보자는 바람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노력한 사람에게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개인 기업의 사고와 행동도 정부의존적 태도, 남이 하니 따라한다는 수동적 습관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사람의 능력을 서로 높여주는 사회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초는 교육에 있다.

가정은 물론 지역사회 학교 시민단체가 손을 잡고 교육혁신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

교육이야말로 국가미래와 기술, 문화수준을 좌우하는 열쇠가 아니겠는가.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