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한국 기업이다. 외국계 회사라고 부르는건 싫다"

지난 9일 서울 방이동의 르노삼성자동차 잠실영업소에서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행사가 열렸다.

한복을 잘 차려 입은 푸른 눈의 외국인 신사가 전통 한국 음식으로 차려진 백일상 앞에서 포즈를 취한 것.

이날로 출범 1백일을 맞은 "르노삼성"의 프랑스인 총수 제롬 스틸 사장이 주인공이었다.

지난 9월1일 프랑스 르노자동차가 삼성그룹으로부터 70.1%의 지분을 인수, 새롭게 출범시킨 르노삼성의 "한국 토착기업화"를 향한 결연한 의지를 전통 한국식 백일상에 담았다는 설명이다.

주한 외국계 기업들 사이에 "토착 한국 기업"으로의 변신 작업이 한창이다.

중소기업들을 상대로 "리스크는 크고 수익은 불확실한" 한국식 대출영업에 뛰어들기로 한 씨티은행에서부터 사장 등 주요 경영진을 한국인으로 구성해 "토종 경영"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인텔코리아에 이르기까지 토착화의 노하우도 다양하다.

일부 업종에서는 외국계 기업이 M&A(기업인수합병)를 통해 국내 간판 기업을 송두리째 인수, 곧바로 "한국 대표 기업" 자리를 꿰찬 경우도 있다.

97년말 겪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 직후 미국계 존슨&선사에 팔려 국적이 바뀐 살충제 분야의 선두 주자 삼성제약, 미국회사 질레트로 소유권이 넘어간 건전지 분야 1위업체 로케트전기 등이 그런 예다.

공격적인 투자와 매출 호조에 힘입어 당당히 국내 유수의 대기업군에 진입한 외국계 기업도 드물지 않다.

정보기술(IT) 분야의 노키아TMC와 모토로라코리아, 한국휴렛팩커드,한국바스프 등 4개사는 지난해 기준으로 국내 매출기준 2백대 기업에 위치했다.

AIG생명과 한국후지쯔, 유니시스, 한국소니, 썬마이크로시스템즈코리아, ING생명, 알리안츠제일생명, 한국암웨이, 샤넬, 레미마틴 등은 산학협동이나 각종 기부금 출연, 사회사업 등을 통해 "친근한 이웃같은 기업"의 이미지를 쌓아 나가고 있다.

이처럼 방식은 다양하지만 이들 외국계 기업이 벌이는 작업은 한가지로 귀결된다.

"외국 회사"로서의 다양한 무늬와 빛깔을 "한국색(色)"으로 덫칠, "현지화된 한국 기업"으로 면모를 일신한다는 것이다.

요즘 세계 기업들의 화두(話頭)로 떠오른 "글로컬화(glocalization)" 추세에 적극 대응하기 위한 실천 전략이기도 하다.

"글로컬화"란 "세계화(globalization)"와 "현지화(localization)"의 합성어.

기업들이 국경을 뛰어넘어 세계 각지에 직접 진출하되 해외 각 지점이나 현지법인들을 주재국가의 문화와 풍토에 일치시키는 현지화를 병행 추구한다는 뜻이다.

"글로컬화"란 새로운 이념으로 무장한 외국계 기업들의 "한국 토착화" 변신 붐은 국내 산업계에서 일대 판도 변화의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화학과 제지.제약 등의 업종은 이미 외국계 기업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

정보통신과 환경 제약 등 미래 고부가산업을 중심으로 금융 유통 소비재 등 국내 경쟁력이 취약한 산업들도 멀지 않아 외국계 기업들의 "판"이 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실제로 최근 국내 경기가 뚜렷한 하강세를 헤매고 있음에도 한국으로 향하는 외국계 기업들의 발걸음은 줄곧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 1998년 88억5천만달러어치였던 외국인의 대한(對韓)직접투자(FDI) 금액은 지난해 1백55억4천만달러로 곱절 가까이 늘어났고 올들어 9월말 현재까지 1백4억2천만달러로 전년동기 대비 23.1% 뜀박질했다.

특히 제조업 분야의 투자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올들어 9월말까지 외국기업들은 전기전자.기계.운송기기 등을 중심으로 작년 같은기간보다 32.6% 많은 54억5천만달러 어치를 투자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들어 더욱 주목되는 것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로까지 외국계 기업들이 손길을 뻗치고 있다는 점이다.

네덜란드의 필립스사가 지난 6월 LG전자로부터 LCD(액정표시장치) 사업부문을 50대 50 합작 형식으로 인수, 2002년까지 19억달러를 들여 TFT(박막)-LCD 공장을 건립키로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필립스는 최근 LG의 모니터 사업부문까지 인수키로 하는 등 한국 진출을 부쩍 강화해 주목을 모으고 있다.

독일 계열의 한국바스프사는 대상그룹(구 미원)과 동성화학으로부터 라이신 및 폴리올 사업부문을 각각 인수 및 합병, 향후 4년간 4억달러를 투자해 석유화학공장을 짓는다는 마스터플랜을 최근 내놓았다.

외국계 기업들은 이처럼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상당 분야에서 국내 산업계의 "주류" 위치에 올라섰다.

초산과 폴리우레탄 원료인 MDI, 카본블랙, 판박 알루미늄, 신문용지 등의 시장에서는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으며 살충제와 종묘,맥주, 필름 등에서는 국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외국계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핵심 산업 가운데 하나인 자동차 분야에서도 최근 외국계 기업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미국 델파이사의 자회사인 한국델파이가 97년말의 외환위기 이후 만도기계를 밀어내고 국내 자동차부품업계 1위 자리에 오른 것을 필두로 자동차산업에서도 "외국색"이 짙어지고 있다.

르노의 삼성자동차 인수를 서막으로 독일계 다임러크라이슬러사는 현대자동차의 지분 15%를 인수했으며, 대우자동차는 미국 제너럴모터스(GM)사와의 매각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중공업 분야에서는 스웨덴의 볼보가 삼성중공업 중장비부문을 인수, 3년만에 흑자 기조로 돌려놓는 역량을 발휘했다.

이밖에도 대우중공업에서 분할된 대우종합기계와 대우조선은 국제 입찰을 통해 외국계 기업으로의 변신이 예고돼 있다.

한국중공업도 민영화 과정에서 해외 지분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경영 효율"을 최우선시하는 외국계 기업들의 대거 한국 진출과 그에 뒤이은 토착화 전략은 "토종" 국내기업들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국내 최대의 대기업그룹인 삼성이 최근 현금흐름과 미래 수익창출 가능성을 중시하는 경영 전략을 범그룹적으로 채택한 것은 이처럼 달라진 환경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으로 볼 수 있다.

전경련 전무를 지낸 유한수 CBF금융그룹 회장은 "국내 기업들은 의사결정 시스템과 인사관행 등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끔 혁신해 나가는 한편 외국기업들을 전략적인 파트너로 인식해 능동적으로 접근하는 등 실천적인 대응전략을 서둘러야 할 것"이라고 권고한다.

이학영 기자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