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는 ''부패와의 전쟁''으로 연일 달아오르고 있다.

말라카냥 대통령궁 주변에는 9일에도 수많은 시위대가 몰려들어 불법 도박자금 수뢰혐의를 받고 있는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한구석에서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화형식을 하던 해외거주 근로자 모임 ''미그란테''의 한 회원은 "더이상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아서는 곤란하다"며 "필리핀의 최대 외화가득원인 해외거주 근로자들의 송금을 중단시켜 에스트라다를 압박하겠다"고 말했다.

마닐라에서 2년반째 사업을 하고 있는 다국적기업 ''얼라이드 도멕''의 필리핀·대만 지사장 세이모르 페라이라씨는 "페소화가치 하락,필리핀 금융위기설의 진앙은 낙후되고 부패한 필리핀정치 행태에 있다"며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한 경제위기가 다시 찾아오지 말란 법도 없다"고 말했다.

연초 미국달러화에 대한 페소화 환율은 달러당 39∼40페소 선으로 안정돼 있었다.

그러다가 9월 말∼10월 초에 들어서면서 페소 환율은 42∼43페소로 올랐고 지난주에는 최고 51.9페소까지 치솟았다.

페소화가치가 급락하면서 외환시장의 일교차도 매우 심해졌다.

필리핀의 금융위기는 변하지 않는 구태 정치가 원인이다.

마닐라에서 수년째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는 데리 곽씨도 "정치문제를 빼면 최근 필리핀경제가 특별히 나빠질 이유가 없다"며 "정쟁이 심화되면서 화교와 미국계 자본이 달러를 마닐라시장에 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8일 에스트라다와 그에게 뇌물로 도박자금을 건넨 싱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소개하면서 "개혁이 왜 그렇게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필리핀경제의 기틀이 아직은 괜찮다.

수출입 동향이나 주가 금리가 대체로 이전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 유럽 등 외국자본의 향방이다.

교민 전찬기(사업)씨는 "야당이 대통령을 탄핵하려 들고 시민들의 사임요구 시위가 계속되는데 외국자본이 투자는 않더라도 서둘러 빠져나가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외국자본들의 마음은 이미 필리핀을 떠나고 있는 것 같다.

압도적인 지지로 선출된 대통령이 뇌물사건에 연루돼 쫓겨날 처지가 됐다는 필리핀의 정치적 현실에선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판단이 지배적이다.

외국자본이 잇따라 이탈하면 또 한 차례의 외환위기가 불가피하다.

한국정치권의 개혁문제와 관련,필리핀사태는 적지 않은 시사점을 우리에게 던진다.

마닐라=허원순 기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