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이 가계대출과 국공채 투자 등 안전한 투자에만 돈을 굴리고 있다.

금융 구조조정 과정에서 소매전문 은행들이 리딩뱅크(선도은행)로 부상하면서 이런 현상이 가속화되는 추세다.

직접 금융시장이 얼어붙은데다 은행들이 보수적인 자금운용을 지속할 경우 "신용경색 심화->기업부도->금융권 부실확대"란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 절름발이 우량은행 =우량은행이라고 하는 주택과 국민은행의 올 상반기중 예금증가액은 무려 18조원에 달한다.

나머지 시중은행들의 예금증가액을 합한 것보다 많다.

이중 기업에 대출한 돈은 두 은행을 합해 3조5천억원에 불과하다.

가계대출로 들어간 돈은 5조7천억원에 달한다.

주택과 국민은행의 개인대출(가계+주택대출) 비중은 각각 85.8%와 36.1%를 차지하고 있다.

우량하지만 기업금융면에서는 "절름발이" 격인 이들 은행으로 돈이 집중돼 기업금융이 메마르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기업금융 비중이 높은 조흥 한빛 외환은행의 경우 유동성 부족과 2차 구조조정에 대한 우려로 기업금융에 소극적이다.

해외에 매각됐거나 외국 은행 출신 행장이 들어선 제일과 서울은행은 아예 소매전문 은행으로 변신을 선언했다.

조흥 한빛 외환은행의 총대출금중 기업자금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73%를 넘는다.

이들 은행이 주택이나 국민은행처럼 소매금융 위주로 여신을 취급한다면 기업부문의 자금부족 규모는 6조4천억원(국민은행의 기업대출비율을 적용할 경우)에서 최대 31조5천억원(주택은행의 기업대출 비율 적용)에 달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 실물경제 위기 부른다 =은행의 보수적인 자금운용 탓에 정부가 내놓은 자금안정책도 표류하고 있다.

기업의 자금숨통을 터줄 것으로 기대했던 10조원 규모의 채권전용 펀드는 은행들이 출자를 미뤄 18일 현재 2조9천8백90억원을 모으는데 그쳤다.

이중 회사채를 사는데 쓴 돈은 8%인 2천4백억원.

나머지는 국고채와 콜론 등으로 운용하고 있다.

LG투자증권이 50여개 기업의 회사채를 묶어 발행하려던 발행시장 채권담보부증권(프라이머리CBO)도 은행권의 인수 거부로 내달 2일로 연기됐다.

이에 따라 지표금리가 연중 최저치 경신 행진을 거듭하는 가운데 초우량 기업을 제외한 중견기업들은 인수처를 구하지 못해 회사채 발행을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내달초와 중순에 걸쳐 LG 현대 대우증권이 2조5천5백억원 어치의 프라이머리 CBO를 발행하면 회사채 시장에 다소 숨통이 트일 전망이다.

심재웅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금융기관들이 위험을 피해 안전한 투자처로만 도피할 경우 그 여파가 실물경제로 번져 경제시스템 전체가 위험에 빠지게 되는 역설적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 시중은행장은 "우리나라 기업들의 신용등급을 10단계로 나눠 보면 부실등급(7등급) 바로 위인 5-6등급에 대부분 집중돼 있어 대출을 함부로 늘릴 수 없는 상황"이라며 "신용위기의 진원지가 기업 스스로에 있다는 점에서 기업의 강도높은 자구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