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채시장 마저 말라버렸습니다"

19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만난 A사 자금담당 임원 K씨는 속속 죄여오는 상환압력에 답답함을 느끼듯 자리에 앉자마자 넥타이부터 풀어헤쳤다.

연초만 하더라도 IMF위기를 넘겼다면서 한숨돌리던 그가 요새는 TV의 김정일 뉴스마저 건성으로 보아넘길 정도로 피말리는 하루하루를 보내고있다.

그의 일과는 종금사 출근으로 시작된다.

그동안 갖은 수단을 동원해 몇개의 만기도래 기업어음(CP)을 막았지만 이제 방법이 없다는 종금사직원의 얘기에 망연자실한채 회사로 돌아왔다.

종금사도 기업못지않게 사정이 좋지않다는 것을 뻔히 아는 그로선 마장 조를수도 없는 노릇.

"하루종일 금융기관 사람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다 퇴근할 때면 인간적인 모멸을 느낄 때도 많습니다"

오전 11시쯤 주거래은행을 찾아간 K씨는 당좌대월 한도 확대를 놓고 또 다시 은행직원들과 입씨름를 해야 했다.

지점장까지 만나 겨우 몇십억원의 당좌한도를 늘려놓았으나 그 정도로는 곧 만기도래할 회사채를 상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했다.

더욱 답답한 일은 회사가 작년에 사상 최대의 흑자를 낸데 이어 올들어서도 경상이익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A사는 연매출 3천억원대의 중견기업으로 올 상반기중 주가관리를 위해 상당금액의 자사주를 매입할 정도로 자금사정이 좋았다.

사채시장을 가보면 어떻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K씨는 손부터 내저었다.

"턱도 없는 얘깁니다.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지금 이 판국에 돈을 내줘요?"

새한이 워크아웃에 들어가고 현대건설마저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전주들이 일제히 금고를 잠갔다는 것이다.

연 30%의 이자를 쳐준다고 해도 끄덕도 하지않는다고 한다.

정체불명의 브로커로부터 자금지원 제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사기성"이 짙은데다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어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K씨는 오후에 거래 종금사와 투신사 관계자를 만나보고 밤에는 은행 여신담당부서을 다시 찾아갈 것이라고 했다.

"딴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저 부딪혀보는 수 밖에..."

요즘 A사같은 자금난을 겪고있는 기업들은 한둘이 아니다.

저금리에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린다는 기업들이 두 눈 멀쩡히 뜨고 흑자도산 위기에 내몰려있다.

무지막지한 금융기관을 탓하거나 정부의 무성의한 금융시장 대책을 원망할 틈도 없다.

일단 돌아오는 자금을 막지못하면 모든게 허사다.

최근 굵직한 계열사를 매각하고 한숨 돌린 30대 그룹의 한 관계자는 "지난 3개월은 피를 말리는 고통의 나날이었다"며 "빚 독촉은 정말 무서운 것"이라고 말했다.

대다수의 기업 자금맨들은 요즘 상황이 IMF 사태때보다 더 나쁘다고 입을 모았다.

그때는 부동산 매각이나 외자유치와 같은 자구계획을 제출하면 곧장 자금지원이 이뤄졌지만 지금은 그나마도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금융권도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부동산 조기매각의 비현실성을 잘 알고있는데다 구조조정이 용이한 여건도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자금맨들의 시름은 깊어간 간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