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타계한 고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은 한국 철강산업의 태두다.

그는 창업자인 선친 장경호씨와 함께 지난 56년 동국제강에 몸담은 이후 평생 철강산업 한우물을 파온 경영인이었다.

서울 한복판인 을지로 입구 수하동에 있는 3층 짜리 낡은 동국제강 본사 사옥이 말해주듯 고 장회장은 부동산투기나 사업다각화는 담을 쌓고 살았다.

평소 "사옥 짓는 데 쓸 돈 있으면 공장설비를 늘려야 한다"며 "사업다각화는 동국제강이 일본 철강산업을 따라잡을 때까지는 말도 꺼내지 말라"고 간부회의에서 말했다.

54년 선재를 생산하면서 민간업계 최초로 철강업에 진출한 동국제강은 지난 63년 부산 용호동 앞바다 갯벌 1만평을 매립,연산 1백40만t 규모의 국내 최초의 근대화된 철강공장을 건설했다.

포항제철 준공보다 10년 앞선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말릴 정도로 과감한 선택이었다.

이처럼 전기로 제강기술을 도입,선진철강 기술을 국산화하는 데는 고인의 공헌이 컸다.

동국제강은 계열사 14개를 거느린 재계 서열 15위의 그룹임에도 불구,철강 기계 가스 등 철강관련 계열사만을 고집하면서 건전한 재무구조를 지닌 기업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매출 1조4천억원(수익 5백8억원)을 기록한 동국제강의 부채비율은 1백36%.고 장 회장은 계열사인 중앙종합금융에서조차 한번도 급전을 끌어쓰지 않았다.

그는 차입을 통한 무리한 확장경영 대신 언제나 이익을 재투자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때문에 그는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경영인"으로 일부에서 평가받았다.

하지만 IMF(국제통화기금)관리 한파를 이겨내면서 다른 기업의 부러움을 샀다.

고인은 투명한 기업경영론자였다.

지난 92년 조세의 날에 금탑 산업현장을 받았을 때 "기업이 절세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탈세는 기업인의 수치"라는 말을 남겼다.

86년엔 연합철강과 국제종합기게 국제통운을 해체된 국제그룹에서 인수했다.

연합철강의 옛주인인 권철현씨 일가와는 최근 연철철강 증자문제 등을 놓고 갈등을 겼었다.

98년 그룹의 모태인 부산공장을 폐쇄하면서 1백억원을 출연,재단법인 대원문화재단을 설립해 극빈 학생과 불우 노인들을 지원해왔다.

부산 태생으로 서울농대와 미국 미시간대를 졸업한 그는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과 철강협회장,대한테니스협회장 등을 역임하며 왕성한 대외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작년말 동국제강 명예회장을 맡으면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2세 경영체제를 구축했다.

22년간 동국제강에서 경영수업을 받은 장남인 장세주 사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줬다.

타계하기 전 포항제철 사장 출신인 김종진 부회장을 영입,동국제강의 전문경영인 체제를 갖추기도 했다.

생전에 "회사경영은 가장 잘 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동국제강 관계자는 말했다.

동국제강 그룹 계열사중 한국철강은 고 장상태 회장의 동생인 장상돈씨가 사장을,동국산업은 동생 장상건씨가 회장을 맡고 있어 동국제강과 소그룹 계열분리를 위한 지분정리 문제가 남아있다.

고인은 "1백만원만 있어도 설비에 투자하겠다"는 생전의 말처럼 화장을 유언으로 남겼다.

고인의 뜻은 고 최종현 SK 회장에 이어 화장문화를 선도하는 귀감이 될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정구학 기자 cgh@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