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표연탄 신화를 창조한 고 정인욱 강원산업 창업자의 추모집이 1주기를 맞아 오는 24일 발간된다.

이 추모집은 흔히 볼수있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다.

초창기 한국 산업의 기틀을 다지는데 혁혁한 업적을 남겼으면서도 끝내 패자로 사라져간 "비운의 기업인"이 남긴 숨김없는 인생사다.

고인의 전기편찬회 간사인 김입삼 전국경제인연합회 고문은 14일 "오는 24일 전경련 회관 20층 경제인클럽에서 추모집 출판기념회를 열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 고문은 "청소년들에게 한강기적의 진정한 주역은 누구인가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전기를 펴내게 됐다"고 추모집 편찬 동기를 설명했다.

추모집은 "선각자 정인욱"이란 제목아래 "우리 기술,우리 자본의 가능성에 도전했던 석탄산업의 개척자"란 부제를 달아 전기 형식으로 쓰여졌다.

찬사 일변도의 다른 전기와 달리 해방후 한국경제사의 한 획을 그은 고인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5백34쪽 분량에 담았다.

고인의 3녀로 화가인 정인희씨는 주인공이 산 정상을 향해 끝없이 전진하는 그림을 책 표지에 그렸다.

이 그림은 굴러떨어질 바위를 짊어지고 올 라 가야만 하는 인간의 운명을 그린 희랍의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시킨다.

이 추모집은 김유선 전 강원탄광 사장이 기술한 "석탄산업의 개척자,정인욱 약전"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추모집 집필을 맡은 김용삼 월간조선 기자는 고인의 삶을 생생하게 그리기 위해 유족과 재계인사 등을 만나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했다.

전기는 원리원칙대로 살다간 고 정인욱 회장을 사업가라기 보다는 경세가의 풍모를 지닌 인물로 평가했다.

추모집중에서 주요 부분을 소개한다.

<>선각자 =고 정인욱 회장은 해방직후인 47년 철도를 부설,석탄을 개발하고 전기와 철을 생산해 경제발전의 기폭제로 삼자는 "태백산맥 종합개발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을 밝힌 그는 당시 미군정청으로부터 정신병자로 취급당하며 중상모략을 당해 형무소 신세까지 졌다.

고인의 태백산개발 구상은 70년대 박정희 정부에 의해 실현됐다.

20년 앞을 내다본 선각자적 구상이었다.

<>장관 자리를 거절하다 =71년 전경련이 주최한 김종필 국무총리 취임 축하회식 때의 일이다.

김 총리는 당시 정회장에게 "5.16 직후 제가 장관 자리를 권해서 거절하신 분은 정 회장 한 분이었다"며 술잔을 권했다.

어느 지인이 서울 강남에 땅을 사두라고 권유하자 고인은 "너절한 땅장사를 하라는 말이오"라며 거절하기도 했다.

<>진퇴가 분명 =56년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석탄공사 총재로 임명했다.

고인은 세 가지의 총재수락 조건을 달았다.

첫째 석공 운영이나 인사에 개입하지 말 것,둘째 탄값을 즉시 지불할 것,셋째 이상의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총재직을 즉각 사임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노조와 협의해 석공을 1년만에 적자에서 흑자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59년말 3.15부정선거때 선거용 인사청탁이 들어오자 취임때 약속과 다르다며 미련없이 물러났다.

<>탄광에 목숨을 걸고 =47년 군정청에 근무하던 고인이 장성탄광을 방문했을 때 산에서 공비를 만났다.

공비는 일행을 총살하려고 했다.

고인은 "우리는 탄광기술자요. 공화국에서도 우리 같은 기술자가 필요할 것이요"라고 외쳤다.

공비는 고인의 손을 만져보고 "손을 보니 기술자가 틀림없군"이라며 "인민공화국 만세 삼창을 하고 돌아가시오"라고 말했다.

일행은 만세 삼창을 부른 뒤 도망쳤다.

<>고뇌의 만년 =고인의 만년은 편치않았다.

곤욕도 많이 겪었고 그 때문에 괴로움도 많았다.

그것은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탄광 이상촌"을 실현하겠다는 신념과 은행돈을 쓰지 않고 부동산투자를 멀리한 당시로선 시대착오적(?)적인 경영관과 현실간의 괴리에서 오는 고뇌였다.

그는 경영일선에 나선 두 아들(문원,도원)과의 마찰등 인간적인 약점과 회오를 50평생 고락을 같이한 김유선씨(강원산업 고문)에 털어놓았고 추모집에 숨김없이 실렸다.

<>단점도 많았다 =고인은 평생 일밖에 몰랐던 기업가다.

그러나 삼표연탄 신화의 성취감을 바탕으로 무리하게 철강공장 시설에 투자하는 바람에 삶을 마감하기 직전 IMF(국제통화기금)을 만났다.

강원산업을 벼랑 끝으로 몰고갔다.

기업가로서 장점도 많지만 결점도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신념이 지나쳐 고집이 되고 만년에는 융통성마저 잃은 듯했다.

<>패자의 소중한 교훈 =강원산업이란 간판은 내려지고 고인이 세웠던 철강공장은 인천제철과 합병됐다.

하지만 일부 재벌기업의 문어발식 확장과 부도덕한 이윤추구로 기업 전체가 손가락질 당하는 시대풍조 속에서 정인욱 같은 패자의 교훈이 더 소중한 시점이기도하다.

고인은 임종을 앞두고 "승자 뒤에는 패자가 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며 자녀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정구학 기자 cgh@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