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돈을 시중에 넉넉하게 푼다고 써도 되느냐"

"그건 곤란하다. 통화를 단지 안정적으로 공급한다고만 해달라"

2000년 통화정책방향 발표가 끝난 후 기자들과 박철 한국은행 부총재보
사이에 오간 얘기다.

한은이 상당한 고민에 빠져있다는 흔적이 엿보인다.

전철환 한은 총재도 13일 이같은 우려를 나타내고 "연중 통화신용정책은
물가안정기반을 다지는데 중점을 두겠다"고 말했다.

금융시장 안정을 거론하던 종전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그는 이어 "물가상승압력이 현재화될 가능성이 있을 경우 선제적으로 대처
하겠다"고 밝혔다.

작년 7월 대우사태가 불거진 이후 자제하던 "선제적(preemptive)"라는 말을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금융시장에 대한 한은의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 눈길을
끈다.

지배력이 커질수록 한은의 금리정책 변화는 시장에 잘 먹힌다.

금리파급효과가 높아진다는 얘기다.

한은은 앞으로 유동성조절대출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한은은 금리공시기능(중앙은행의 정책방향을 시장에 알려주는 것)을 강화
하기 위해 선진국형 대출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의 경우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단기금리를 조정할 때 연방기금
(FF) 금리와 재할인금리 등 두가지를 활용한다.

통상적으론 FF금리를 올리거나 내리지만 시장에 보다 확실한 시그널을
주고 싶을 땐 재할인금리를 조정한다.

이같은 방식을 한국에 도입하겠다는게 한은의 구상이다.

물론 현재에도 중앙은행의 재할인금리가 있다.

총액한도대출 금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연 3%로 고정돼 있다.

또 대출한도를 신축적으로 조절하는게 어려워 통화정책기조의 변화를
시장에 전달하는 기능이 없다.

한은은 그동안 공개시장 조작금리를 통해 정책의도를 전달해 왔다.

RP(환매채)금리를 조작해 콜금리를 관리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금리의 경우 궁극적으로는 시장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금리공시
기능이 미약한게 사실이었다.

대부분 선진국에서는 통화정책기조를 바꿀 필요가 없을 경우에는 공개시장
조작을 통해 단기금리(콜금리 등) 운용목표를 미세 조정한다.

정책기조를 변경할 때에는 대출(재할인)금리를 조정하는게 일반적이다.

한은의 금리정책도 앞으로 이처럼 운영될 예정이다.

이는 금리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통화정책을 운용하겠다는 방침을 구체화
하는 차원이기도 하다.

< 이성태 기자 steel@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