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만나자고 해 갔더니 기자들이 있어 꼭 사기당한 것 같더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이 지난 19일 현대.LG 회장과 3자 조찬회동을 가진
뒤 금감위에 돌아와 한 말이다.

그는 3자회동 장면이 까발려져 정부가 빅딜에 개입했다는 증거로 남는 게
못마땅한 듯했다.

다른 금감위 관계자들도 "두 그룹중 최소한 한 곳이 일이 잘못됐을 때
정부에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회동사실을 흘렸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금감위는 기업구조조정과 관련해 결재서류가 거의 없다고 한다.

금감위가 금융기관 사람들에게 자료를 배포하는 일도 드물다.

금융감독원 임원이나 국장을 시켜 구두로 지시하는 경우가 더 많다.

혹 문서를 내려보내더라도 그 문서 표지만 봐선 출처를 알수 없다.

제목과 날짜만 있고 "금융감독위원회"라는 작성기관 이름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모두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는 발상에서 비롯된다.

정부개입 증거를 남기지 않겠다는 금감위의 "의지"가 어느정도인지는
여의도 청사를 잠시만 둘러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일례로 실무를 총괄하는 금감위 서근우 제3심의관 팀의 방 문은 굳게 잠겨
있기 일쑤다.

"개별기업에 관한 정보가 새면 곤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금감위가 기업 일에 관여하고 있다는 그만한 증거도 없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금감위는 자신들이 의도한 것과 달리 어느새 시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모든 일에 개입하는 그런 전지전능한 기관으로 인식되고있다.

대우그룹이 지난 19일 구조조정계획을 발표했을 때의 일이다.

이 위원장은 "김우중 회장이 큰 결심을 했다"고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던 것은 "금감위가 어떻게 팔을 비틀었길래
김 회장이 저렇게 직접 나섰느냐"였다.

금감위는 금융기관 자율을 얘기하면서도 개별기업의 자금줄을 끊을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과시하곤 한다.

과거 감독당국은 특정기업의 자금줄을 죄는 것을 "권력의 남용"쯤으로
여겼는데 금감위-금감원은 "당연한 건전성감독"으로 본다.

그러나 건전성감독은 고무줄과 같다.

말을 듣지 않는 기업에 대해 이런저런 이유를 들이대며 자금줄을 끊겠다고
하면 그만이다.

과거의 관치보다 더 무서운 관치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은행 핑계를 대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조흥 한빛 제일 서울 등 대형시중은행이 국유화돼 있기 때문이다.

< 허귀식 경제부 기자 window@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