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바늘이 자정으로 치닫는 지난 8일의 서울 동대문시장.

두산타워 밀리오레 등 대형 쇼핑몰에 밤늦게 퇴근한 직장인과 주부 여고생
등 쇼핑객이 줄을 이어 몰려들며 잔칫집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IMF 불황이 불과 1년전이었다는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같은 시간.

디자이너클럽 팀204 등 길 건너편의 도매전문상가 옆으로 대형버스들이
들이닥친다.

부산 대구 청주 등 지방도시의 의류소매상들을 서울로 실어나르는 버스다.

그러나 흥청거리는 신흥상가와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주차장은 한산하고 상인들의 표정도 밝지 않다.

도매시장에 올라오는 버스의 숫자는 지방경기의 수준을 재는 바로미터다.

버스가 적다는 것은 지방경기가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프레야타운 상인연합회 정훈희 대리는 "부산의 경우 97년초엔 매일 밤 약
15대가 올라 왔으나 IMF를 거치며 5대로 줄어든 이후 늘어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상인들의 돈 돌아가는 사정을 가늠하는 은행 평균잔액에서도 침체된
분위기는 마찬가지다.

한빛은행 동대문지점의 한 관계자는 "상인들의 입.출금 규모가 작년수준이나
별 다를바 없다"며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지만 지방이나 서민들의 체감경기
는 조금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9일 오전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

지난 2일부터 시작된 세일로 매장에는 발디딜 틈이 없다.

롯데 현대 신세계 등 대형 백화점들은 세일시작 7일간 매출이 지난해
세일때보다 29.2% 늘어나는 호황을 누렸다.

현대백화점 나현덕 과장은 "고객도 많아졌지만 1인당 쇼핑액수도 크게
늘어나 씀씀이가 확실히 커졌음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이번 세일의 매출향상을 앞장서 이끈 것은 고가 의류와 대형 가전제품들
이다.

하지만 같은 백화점 매장내에도 우울한 구석은 있다.

여성의류와 유아동복은 매출이 급증했지만 신사복의 판매량은 오히려
오그라들었다.

롯데 영등포점 신사복매장의 김용묘씨는 "신사복은 샐러리맨들의 주머니
사정을 알려주는 경기지표상품"이라며 "유행에 민감한 여성들의 소비심리는
살아났지만 직장남성들의 지갑엔 아직 봄이 오지 않은 것 같다"고 씁쓰레
했다.

같은날 오후 직장인들이 점심식사를 위해 몰리는 을지로 먹자골목.

이 거리에서 호기롭게 신용카드를 그어대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카드를 앞장서 긋는 사람은 십중팔구 직장간부 아니면 영업사원들이다.

한 신용카드회사 관계자는 "부유층을 타겟으로 한 아멕스 등 일부 카드사의
1인당 사용액은 IMF이전 수준까지 회복됐으나 대중적인 카드는 더 줄었다"고
들려줬다.

한마디로 소득계층간 돈씀씀이의 간격이 더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서울 강남의 패밀리레스토랑은 평소 같으면 젊은 연인들로 매장이 채워지던
곳.

그러나 최근에는 저녁이면 온가족이 오손도손 외식나들이를 즐기는 모습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고 베니건스의 관계자는 귀띔한다.

IMF 한파의 영향으로 지난해 손님이 크게 줄었던 놀이공원도 고객의 발길이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에버랜드의 올 1~3월동안 입장객수는 1백13만6천명으로 경제위기 전인
97년의 1백12만6천명을 1만명 웃돌았다.

하룻동안 둘러본 서울시내 소비현장의 표정은 대체적으로 봄 분위기가
완연하다.

그러나 계층간, 지역간 양극화의 골은 아직 메워지지 않고 있다.

이같은 양극화의 흔적은 골프채, 해외여행상품, 대형 가전제품, 수입의류
등 고가품의 판매는 호조를 보이고 있는 반면 생수 영양제 구두 등 서민적
상품의 판매는 부진을 면치 못하는데서도 다시 확인된다.

롯데백화점 광주점의 최성헌 과장은 "대형 백화점 매출은 늘어났지만
남광주시장 상무시장 등 재래시장과 중소형 점포들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지방에서는 업태간 명암이 더 심해졌다고 들려줬다.

유통업체 일선 관계자들은 소비현장의 봄이 아직은 고소득층, 여성및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일부에만 찾아온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소득분포의 밑을 이루는 서민들의 체감경기는 대체로 썰렁한채 상층부의
실내공기만 훈훈한 "마룻방경기"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해석이다.

< 이영훈 기자 bria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