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도 이런 죄인은 없습니다. 이렇게 매도해도 되는 겁니까"(S그룹
K전무)

IMF시대로 접어들면서 한국의 경영인들은 이미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숙인 고개가 완전히 떨구어져 있는 상태다.

이 나라 경제를 이끌어온 주역으로 추켜 세워졌던 그들이건만 국내외
어디를 둘러봐도 같은 편은 없다.

부실경영 책임을 물어 지난 24일 제일은행 전직임원에 대해 법원의 배상
판결이 내려지면서 자칫 잘못하단 평생 모아온 재산마저 내놔야할 처지에
몰려 있다.

"사장 전무 상무 등으로 불려지는 호칭자체가 싫다"(D그룹 L전무)고 할
정도다.

소외감을 지나 자기비하도 서슴지 않고 있는 셈이다.

"많은 금융기관들이 부실해질수 밖에 없었던 근본이유가 뭔가. 관치금융
때문이 아닌가. 물론 경영 책임을 면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지만
이미 책임을 지고 옷을 벗은 사람들에게 배상까지 하라니 이건..."

제일은행의 한 임원 말이다.

경영인들의 의욕이 이처럼 땅에 떨어진 것은 크게 보아 경영환경 급변에
있다.

무엇보다도 이해관계자들의 경영간섭 강도가 예전과는 비교할 정도가
아니다.

소액주주는 물론 정부 근로자 외국인까지 나서 경영에 "밤놔라 대추놔라"
한다.

간섭만 하면 그래도 괜찮다.

이번 법원판결은 예삿일이 아니다.

소액주주들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질수 밖에.

회계장부열람권을 이용해 회사장부를 보자는 요구도 봇물을 이룰게 틀림
없다.

경우에 따라선 해임요구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경영인들에겐 때리는 "시어머니"(소액주주)보다 더 미운 것이 말리는
"시누이"(정부)다.

금융감독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검찰등 동원할수 있는 곳은 모조리
동원해 가며 경영인 압박에 나서고 있는 것은 그 대표적인 예.

"명백한 혐의가 없는데도 툭하면 출국금지 조치다. 우리의 명예는 어디가서
찾는단 말인가"(S사 L사장)

"명예도 명예지만 정작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외국인들과의 사업이다"(G사
N사장)

범법인으로 비쳐지는 마당에 사업을 같이 하겠다는 외국인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여기에 사외이사 사외감사들이 쓰고 있는 "색안경"도 경영인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기업 내부는 어떤가.

근로자들은 정리해고에 무조건 반대다.

정리해고를 하지 않으면 공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노조의 떼쓰기"를
달래느라 경영인들은 몸과 마음이 다 지쳐 있다.

게다가 "심기불편한 오너"의 눈치도 살펴야 한다.

은행의 자동입보요구로 회삿돈 빌리는데 보증도 서야 하는 경우가 되면..

그래서 자리를 스스로 그만 두거나 그만둬야 하는 경영인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경영인들에게 더욱 두려운 존재는 외국인들.

외국인 투자자들의 요구는 한국의 전통적 경영자 입장에서 보면 "행패"에
가깝다.

SK텔레콤이나 SKC, 효성T&C를 예로 들것도 없이 경영인들은 외국인들로부터
혼쭐이 나고 있다.

외환은행처럼 외국인이 임원 자리를 차고 앉은 상황이고 보면 기존의 행동
과 사고까지 바꿔야 하니 좌고우면할 틈도 없다.

경영인들은 정말 현재의 위기를 초래한 주범인가.

일부 경영자들의 주먹구구식 경영이나 우물안 개구리식 행동이 전체
경영인을 그렇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경영인에게 돌리는건 맞지 않다는 지적이다.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경영인들을 두둔해서가 아니라 정치인이나 관리 가계등 모두가 오늘의
난국을 불러들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의 경영인들은 누가 뭐라해도 우리경제를 이끌어온 기관차다.

그들의 힘을 북돋워주고 일할 의욕을 되살리지 않고서는 위기는 극복될 수
없다.

경제를 살리자고 떠들기에 앞서 경영인들의 떨군 고개부터 바로 세워주자는
소리가 높다.

< 강현철 기자 hckang@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