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은 처음부터 잘못 계산된 것이었다.

상대는 IMF가 아니라 힐튼호텔 1002호에 캠프를 차린 미국이었다.

착각과 환상의 연속이었다.

나이스 단장 등 IMF의 전문가 그룹은 사실상 세컨라인(제2선)이었다.

지난해 12월2일.

새벽 6시를 갖 지난 시간.

서울소재 모 종금사 사장은 재경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오전 8시까지 신용관리기금 17층 회의실로 나오라는 전화였다. 드디어
올게 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두시간여 후인 8시45분.

9개 종금사 사장과 임원들이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차가 나왔지만 아무도 마시지 않았다.

"공무원 생활 30년에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가슴이 아프지만 이해해
주십시오"라고 윤증현 금정실장은 말문을 열었다.

윤실장은 이날자로 영업이 정지되는 9개 종금사 명단을 발표했다.

말석에 있던 모종금사 임원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혹 선정기준이
있다면-"이라고 운을 뗐다.

말이 채끝나기도 전에 윤실장은 "적절한 때가 오면 말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11월30일 밤 12시쯤 집에 들어 왔다. 옷도 벗기 전에 진영욱 과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새벽 1시쯤 힐튼호텔에 도착했다"고 이종갑 당시 자금
시장과장은 말했다.

힐튼호텔에는 금정실 간부들이 모두 불려 나왔다.

이 시각이 자정께였다.

그럭저럭 순항하던 IMF와의 협상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임부총리는 이에앞서 대기중이던 기자들을 만나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
며 "사실상 협상이 끝났다고 봐도 되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26일부터 본격협상을 시작한지 5일째였다.

청와대에서는 협상타결을 추인하기 위한 긴급 국무회의가 준비되고 있었다.

"나이스 단장은 "시크리트"라며 12개 종금사와 제일.서울 2개은행을 12월
3일까지 즉각 폐쇄하라는 요구를 내놨다. 종금사는 구체적인 명단도 없었다.
우리측에서 강력히 항의하자 나중에야 명단을 내주었다"(최중경 국제협력
과장)

협상이 반전되기 몇시간전인 30일 오후 데이비드 립튼 미국 재무차관이
극비리에 김포에 내려섰다.

하얏트 호텔에 여장을 풀었던 그는 바로 힐튼 호텔로 캠프를 옮겼다.

협상장이 있던 19층에서 한참 떨어진 10층의 1002호실.

나이스 단장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부지런히 10층을 들락거렸다.

미 재무부에서 IMF를 관할하는 라인의 책임자가 바로 그였다.

사실은 그가 IMF였던 셈이었다.

"립튼이 오고부터 계속 새로운 요구들이 쏟아졌다. 나이스 단장은 협의가
진행될 때마다 그에게 보고하고 재가를 받는 것 같았다. 금융기관 정리
문제는 미리부터 나와 있었는데 "즉각 폐쇄"로 된 것은 아마도 립튼의 개입
으로 보였다"(재경원 협상 관계자)

립튼차관은 협상이 끝난 3일 조용히 서울을 빠져 나갔다가 20일 후인
12월22일엔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를 만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

물론 이때는 연신 터져대는 카메라 후레쉬를 온몸에 받는 공개방문이었다.

사실 IMF와 미국의 양동작전은 이보다 빠른 11월28일부터였다.

미국으로서도 다급해졌고 한국정부는 여전히 사태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28일 휴가중인 캠프데이비드 산장에서 김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경제자문관들과 아시아 경제위기에 대한 토론을 끝냈다.

국방성의 한고위관리는 "이것은 휴전선 너머 백만명의 적군과 대치한
나라에서 발생한 일"이라며 미국의 강력한 개입과 조속한 협상을 촉구하도록
클린턴을 이끌어냈다.

클린턴의 전화는 "무얼하고 있느냐. 당장 12월 첫째주면 당신 나라는 파산
이다. 협상을 조속히 마무리지으라"는 요지였다고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증언했다.

클린턴이 제시한 협상 데드라인은 12월1일이었다.

실제로 IMF와의 협상기간동안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더욱 빠른 속도로
줄어들어 12월초에는 거의 60억달러로 낮아졌다.

"금융기관들의 외채 연장율이 20%로 떨어져 국가부도는 초읽기에 몰렸다.
국가부도가 먼저냐, 협상 타결이 먼저냐고 서로 달리기를 벌이는 형국
이었다"(진영욱 과장 증언)

대통령이 클린턴의 전화를 받고나서 임창열 부총리는 일본으로 날아갔다.

11월28일 오후 6시께 임부총리는 미쓰즈카 대장상 집무실로 들어섰다.

"한국의 외환위기는 당신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러니 제발 급전을 좀
꾸어다오"라고 임장관은 달려들 참이었다.(임부총리 증언)

미쓰즈카 대장대신은 대답 대신 루빈으로부터 날아온 한장의 편지를
내밀었다.

이 편지가 어떤 내용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관계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다.

다만 "미국이 일본의 머리를 세게 누르고 있었다. 일본으로서도 어쩔수
없었다"고 당시 임부총리를 수행했던 재경원 관계자는 밝혔다.

협상을 장기화하더라도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겠다는 재경원의 전략은
이렇게 간단히 무너졌다.

힐튼호텔의 협상은 숨가쁜 마라톤을 계속했다.

하루 2시간여만 자고 식사는 햄버거로 때웠다.

양쪽이 마찬가지였다.

12월1일 새벽 9개종금 문제가 해결되고 2개은행 문제는 협상타결 시한인
막판에 가서야 "6개월의 여유를 주되 이를 발표하지는 않는 조건"으로 낙착
됐다.

이 시기에 말레이시아에서는 아세안+6개국 재무차관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 회담에 참석하고 있던 캉드쉬총재는 "협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연신 엄포를 놓아댔다.

말레이시아 회담에는 가이스너 미 재무부 차관보 사카키바라 일본 대장성
차관 등이 와 있었다.

도날드 챙 홍콩 재무장관이 "아시아인들은 서방에 장기투자하고 서방은
그 자금으로 아시아인을 상대로 돈놀이를 한다. 아시아 채권시장을 만들어
독립하자"는 요지의 발언으로 분위기를 잡았으나 회의장 복도와 로비는 온통
한국의 IMF 협상에 관한 얘기들 뿐이었다.

가이스너 차관보는 쉴새 없이 셀룰러폰을 들고 어딘가에 전화를 해댔다.

이 회담에 참석해 있던 강만수 차관은 1일 "중국의 류지빈 재정부 수석
차관과 사카키바라 차관을 만나 급전을 꾸어 보라"는 본국의 훈령을 받았다.

금융기관 폐쇄 문제가 불거지면서 장기전이 가능한지를 타진한 것이었다.

그러나 류지빈 차관은 "국민소득 6백달러 나라가 어찌 1만달러 나라에 돈을
빌려 줄수 있겠는가"고 둘러댔다.

모욕이었다.

"중국은 그래도 외환보유고가 많지 않느냐"고 매달리는 강차관을 수행했던
진영욱 과장이 소매를 당기며 만류했다.

2일에는 사카키바라를 만나라는 훈령이 왔지만 그는 "우리가 도와주어야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잘될 것이다"는 말만 남기고 호텔을 빠져 나갔다.

이날 오후 가이스너 차관이 진과장에게 다가와 "서울 협상이 잘되간다.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며 웃으며 사라졌다.

"정말 기가막혔다. 힐튼호텔에서 협상을 하다 왔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행조건이 공개되었을 때 국민들이 무어라고
말할지 앞이 캄캄했다"고 진과장은 말했다.

다음날인 3일 캉드쉬 총재는 강차관과 함께 서울로 날아왔다.

캉드쉬 총재는 미국의 요구에 더얹어 적대적 M&A도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청와대를 방문하고 나온 그는 "한국은 믿을수 없으니 대통령 후보들이
모두 IMF 협상결과를 받아들인다는 각서를 자신에게 제출하라"고 계속
새로운 요구를 꺼냈다.

첩첩산중이었다.

"김대통령이 대안을 냈다. 각서를 IMF가 아닌 자신에게 내는 형식으로
하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3일 오후 내가 직접 서류를 들고 공항으로
당사로 후보들을 찾아 뜀박질을 했다"(강만수 차관 증언)

3일 저녁 10시 임부총리와 이경식 한은총재가 공동 서명한 이행각서가
세계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중히 캉드쉬 총재에게 전달됐다.

캉드쉬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IMF행을 "불행중 다행(blessing in
distress)"이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IMF와의 협상과정에서 미국이 보여준 신속성과 치밀성은 놀라운 것이었다.

워싱턴을 정점으로 IMF본부와 말레이시아 힐튼호텔 1002호와 19층으로
연결된 조직플레이는 한국을 압도한 것이었다.

그 시간 워싱턴이건 뉴욕이건 동경이건 국익을 위해 뛴 한국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일 저녁 TV를 통해 협상 타결소식을 본 많은 시민들이 신문사 편집국으로
전화를 해왔다.

어떤 할머니는 전화기를 들고 한참을 울기도 했다.

가혹한 시련이 한국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승욱 오광진기자)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