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이었던 지난해 11월16일 오후 3시30분 김포공항.

한창 붐비는 시간었다.

마닐라발 UA808편 비행기가 30분 연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윽고 비행기가 도착하자 재정경제원의 김우석 국제금융증권국장과 최중경
금융협력과장은 호흡을 가다듬고 보딩브리지 끝까지 나갔다.

비행기문이 열리면서 희끗희끗한 머리를 매끄르하게 빗어넘긴 초로의
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셀 캉드쉬 IMF총재였다.

나중에 협상의 실무주역이 될 휴버트 나이스 아시아태평양 국장도 함께였다.

그들은 귀빈실이 아닌 비상구를 통해 1층으로 내려간뒤 세관뒤쪽에 있는
보세창고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재경원의 박영춘 사무관이 렌트한 검정색 다이너스티 한대와
중형차 2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3대의 차에 나누어타고 조용히 공항을 빠져 나갔다.

소문만 무성했던 IMF 구제금융이 한국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중국 등을 순방하던 캉드쉬 총재는
이렇게 서울에 들어왔다.

이날 오후 6시30분 인터콘티넨탈호텔 스위트룸에서 강경식 부총리와 캉드쉬
총재, 이경식 한은총재가 마주앉았다.

엄낙용 차관보, 윤증현 금융정책실장, 김우석 국제금융증권국장, 진영욱
국제금융과장이 배석했다.

강부총리는 캉드쉬 총재와는 이미 구면이었다.

97년4월 필리핀에서 열렸던 APEC 재무장관 회의 이후 거의 매달 해외서
만나 아시아구제금융 문제등에 대해 교감이 있어 왔던 터였다.

"강부총리는 외환 보유고 등 현황을 브리핑하고 IMF지원 가능성을 타진했다.
환율변동제한폭을 15%로 확대하는 등 금융시장안정대책을 19일 발표할 계획
이라는 것도 얘기했다"(진영욱 과장 증언)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캉드쉬총재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얼마나 지원하면 되겠느냐"
고 물었다.

잘 나가던 협상은 여기서 덜컥거리는 소리를 냈다.

강부총리는 IMF의 지원을 요청하기는 했지만 과연 어느 정도의 달러가
필요한 지에 대해 정확한 답을 갖고 있지 못했다.

머뭇거렸다.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사실 재경원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외환위기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은 재경원 관계자의 증언.

"우리로서는 외환위기를 극복하는데 필요한 자금 규모가 단기 유동성
부족분을 채울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11월초 당시로서는
1백억달러 정도였다. 그러나 11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달러유출이 심화되고
또 금융기관들의 부도를 막기위해 상당량의 달러를 이미 소진한 상태였다.
하루가 다르게 상황이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 어느 정도면 외화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돈을 꾸어달라고 하면서 필요한 돈의 규모도 제시하지 못한 꼴이 되었다.

강부총리 측근인 다른 관계자의 증언.

"강부총리로서는 상황이 유동적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며칠후에 끝날
예정이었던 국회에서 막판에라도 금융개혁법이 통과되고 19일쯤 정부의
그랜드 디자인(2월17일자 참조)이 발표되면 외화 썰물 현상은 일단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었다. 급격한 달러 유출만 일단 막아놓으면 1백50억달러
내외의 자금으로 수습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달러는 계속 빠져 나가고 있는 중이었고 IMF 구제금융 신청 이후에는 더욱
거세게 빠져 나갔다.

이는 구제금융을 신청한 나라들에서 예외없이 나타난 현상이기도 했다.

물론 구제금융 신청규모에 대해 전혀 사전토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강 부총리, 김인호 수석, 이경식 총재, 김기환 대사, 엄낙용 차관보,
윤증현 실장 등 5인은 하루전인 15일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리허설까지
가진 터였다.

다음은 리허설 참석자중 한사람의 증언.

"이날 회의에서 캉드쉬 총재에 대한 프로토콜 등 각종 준비가 있었다.
물론 브리핑 내용도 점검했고 IMF측의 예상되는 반응에 대해서도 토론했다.
IMF 구제금융신청과 관련된 향후 일정도 이날 최종 확정됐다. 신청 자금
규모에 대해서는 이경식 총재가 3백억달러 이상은 돼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황한 강부총리가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이경식 총재에게 물었다.

이총재는 잠시 머뭇거린 다음 "필요한 자금규모는 한국은행이 정확하게
계산해 보겠다. 우리에게 맡겨 달라"고 운을 뗐다.

이총재는 이어 "다만 최소한 3백억달러는 돼야 할 것같다. 이는 물론
외국은행들의 만기연장이 순조롭게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고
덧붙였다.

3백억달러 규모 구제금융안은 이렇게 나왔다.

캉드시 총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가지 다른 사항들에 대해서도 합의가 됐다.

잠정 합의 사항은 <>11월19일 한국정부가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 요청한다
<>구제금융 신청 바로 다음날인 20일 IMF 실사단 제1진을 보낸다 <>3백억
달러중 1차분은 연내에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IMF측이 적극 노력한다는
등이었다.(김우석 국장 증언)

3시간 정도 걸렸던 협상은 이렇게 순조롭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회의 말미에 캉드쉬총재가 불쑥 "협약조건에 대한 대통령 당선자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조건을 달았다.

"모두들 당시에는 당연한 얘기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단서가 나중에
정치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민감한 정치현안으로 부상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문제 때문에 많은 혼선이 있었다"고 회의에
배석했던 한 관계자는 말했다.

더욱이 IMF행이 예정됐던 19일 강부총리가 전격 교체되면서 IMF 구제금융
신청일정은 상당한 혼선을 빚게 됐다.

임창열 신임부총리는 통산부 기자실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취임일성으로
"한국은 이자를 한번도 연체한 적이 없는 모범국이다. IMF의 구제금융이
없더라도 국제금융계가 도와주면 난국을 넘길수 있다"고 말했다.

19일 오후 임부총리가 직접 발표한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에서도
캉드쉬 총재와 이미 합의한 IMF 구제금융 신청 사실은 제외됐다.

당초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제금융신청 사실을 공개한다는
계획(윤증현 실장 증언)이었으나 발표에서 누락됐다.

재경원 실무진들이 당황해 했다.

발표를 지켜 보고 있던 이경식 총재도 당황했다.

누구보다 당혹한 것은 미국과 IMF측이었다.

워싱턴에서 출국준비를 끝내고 비행기표까지 끊었던 IMF 실사단 3명은 짐을
다시 풀었다.

20일 오전 루빈 미재무장관의 즉각적인 성명이 튀어 나았다.

"한국이 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금융체제를 강화할수 있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행동을 신속히 취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무엇을 망설이냐는 것이었다.

마닐라에 와있던 티모시 가이스너 미 재무차관보와 스탠리피셔 IMF 부총재
에게 서울행 명령이 떨어졌다.

이 비행기에는 엄낙용 차관보도 올라 있었다.

취임 이틀째인 임부총리는 기자들의 눈을 피해 힐튼 호텔에서 이들과 밀고
당기는 협상을 계속했다.

21일 저녁 대통령이 대선후보들과 만찬을 갖고 동의를 구한뒤 발표한다는
그림이 그려졌다.

당초 21일 정오께 서울을 떠날 예정이었던 스탠리피셔 부총재는 비행기표를
몇번씩 물리면서 발표여부를 확인했다.(임부총리 증언)

막판에 왜 이틀이나 구제금융신청이 지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유력한 설명은 "임부총리가 IMF체제가 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IMF행을 쉽게 결심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
그나마도 빨리 결정한 것"(김우석 국장 증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다 IMF와 미국이 3당 대통령후보들의 동의절차를 요구한 것도 요인이
됐다.

어떻든 구제금융 공식 신청은 대통령 후보들이 청와대에 모여 만찬(21일)
행사를 치르고서야 발표됐다.

11월21일 오후 10시 내외신 기자들이 세종로 정부청사 대회의실로 총집결
했다.

임부총리가 굳은 얼굴로 IMF 구제금융을 신청한다고 발표했다.

이날밤 신문사에는 IMF가 무엇이냐는 시민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최승욱 김성택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