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외환상황이 "위기"의 양상을 보인 것은 이미 작년 여름부터였다.

지난해 8월10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는 서울소재 15개 시중은행의 국제담당 임원회의가
열렸다.

재경원 금융정책실이 극비로 소집한 회의였다.

은행들은 기아사태로 일격을 맞으면서 해외거래선들로부터 빚독촉에
시달리고 있었다.

재경원의 원봉희 당시 금융총괄심의관은 "정부가 금융기관의 부채를 대신
갚아 주지는 않겠다.

외화부도가 나더라도 이는 전적으로 해당은행의 책임"이라며 은행들의
외채 상환을 독려하고 있었다.

"이것 보세요. 뭔가 방법들을 내보세요"라고 원국장은 탁자를 쳐댔으나
은행측 사람들은 꿀먹은 벙어리였다.

이미 8월4일과 6일에 걸쳐 무디스와 S&P사가 우리나라의 신용등급을 잇따라
요주의(크레딧 워치)로 분류, 국제금융시장에 경보발령을 내려둔 터였다.

이런 회의는 이틀이 멀다 하고 열렸다.

어떤 때는 자정을 넘겨가면서 회의가 계속됐다.

서울은행 박희삼 상무의 증언.

"은행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하루에 적게는 1천만달러에서 많게는
5천만달러까지 결제용 달러가 펑크가 나고 있었다. 정부에서 아무리 행정
지도를 해봤자 해외에서 무조건 상환을 요구하고 나서니 방법이 없었다.
재경원도 속이 탓지만 우리도 죽을 지경이었다. 그때부터 이미 국가부도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은행들도 밤낮이 없었다.

낮에는 만기도래 채권의 규모를 확인해 채권기관에 만기연장을 사정해야
하고 밤에는 이미 펑크난 자금을 빌리기 위해 런던과 뉴욕시장을 전전했다.

"달러를 빌리는 것이 아니라 구걸하고 다녔다고 봐야지요"라고 J은행
국제담당 임원은 말했다.

구걸행각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8월초로 기억된다. 그날 우리은행은 당일 결제자금중에 3천만달러의
여유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 3천만달러를 놓고 무려 10개 은행이 달라붙었다.
은행장이 직접 전화를 하며 서로가 자기들에게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신한은행 관계자 증언)

아우성을 치기는 종금사들이 더욱 심했다.

종금사들은 이미 연쇄부도의 낭떠러지로 바짝 다가서 있었다.

30개 종금사 전체 자본금 4조원가운데 3조5천억여원이 부실채권이었다.

외화부문은 사실상 디폴트였다.

종금사들의 당시 외화부채는 27억달러에 달했다.

"종금사는 문자그대로 건드리면 터지는 화약고였다"(D종금 C사장)

결국 1차 쇼크가 왔다.

7개 시중은행과 10개 종금사들은 8월12일 외화부도를 선언했다.

단돈 1천만달러가 없어 디폴트를 선언한 곳이 생겨났다.

재경원과 한국은행이 발칵 뒤집어졌다.

격론을 벌인 끝에 이날 자정이 지나서야 10억달러를 풀어 부도를 막았다.

물론 관계자들 모두에게 엄중한 함구령이 내려졌다.

평소 깔끔한 복장을 자랑하던 원봉희 국장은 수염도 못깍고 눈에는 벌겋게
핏발이 섰다.

"3월말께 일시적으로 자금을 지원해준 적은 있었지만 평상적인 상황에서
금융기관이 부도위기에 몰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무언가 큰 것이 오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고 한국은행 이강남이사는 회고했다.

정부로서도 승부수가 필요했다.

이런 상태로 계속 말려 들어갈 수는 없었다.

며칠이 지난 8월25일 "특단"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금융시장 안정대책이
발표됐다.

제일은행과 부실종금사들에 대해 한국은행의 특융을 단행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됐지만 가장 중요한 내용은 정부가 금융기관 대외채무의 지급을 보증
한다는 내용이었다.

강경식 부총리는 이날 발표를 재경원 기자실이 아닌 과천 청사의 스튜디오
에서 했다.

해외 언론을 의식한 것이었다.

외신은 이 소식을 전세계로 긴급 타전했다.

"정부의 지급보증문제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해외금융기관을
안심시키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재경원으로는 사실상
극약처방을 내놓은 것이었다"(유재한 금융제도과장)

강부총리도 24일밤 금정실 간부들과 발표문안을 다듬으며 "우리는 최강수를
선택했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최악수였다.

정부는 진검승부를 펼쳤지만 정부 자신도 창고가 비어가던 중이었다.

하지만 "특단의 조치"는 국내 시장에서조차 먹혀들지 않았다.

발표 당일 금리와 환율이 치솟고 금융시장의 불안은 오히려 확대됐다.

"정부가 지급 보증 문제를 꺼낼만큼 한국의 금융위기가 심가하다"는 것을
확인해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당시 딜러들은 정부가 금융위기를 마침내 공식선언하는 순간으로 이해했다.

기아문제가 진행중인 상황에서 정부의 지급보증 발표는 분명 선후가 바뀐
것이었다는게 시중은행 외환딜러들의 평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해외금융기관들은 더욱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이제는 금융기관이 아니라 한국정부가 과연 지급능력이 있느냐는 쪽으로
불길이 확산됐다"(외국계 M은행 서울지점의 딜러 S씨)

어떻든 최후의 카드가 먹혀들지 않으면서 8월28일엔 국민 신한 장기신용 등
불과 3,4개 은행을 빼고는 대부분 은행들의 해외 크레딧 라인이 막히기
시작했다.

김석동 외환 자금과장의 증언.

"기가 막혔다. 우리로서는 최강수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조차 먹혀들지
않았다. 정부가 지급을 보증한다는 것도 안먹히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는 것 아닌가. 금융위기가 현실화되고 있다는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9월들어 금융시장은 더욱 혼조를 거듭했다.

8월말 외환보유고는 전달보다 25억3천만달러가 줄어들어 3백억달러를
간신히 넘고 있었다.

미달러화에 대한 원화의 환율도 9백원을 돌파했다.

3일에는 3개월짜리 역외선물환(NDF)이 사상 처음으로 1천원을 돌파했다.

무디스사와 S&P사는 9월초부터 국내은행들을 헤집고 다니며 신용등급을
재조정한다며 법석을 떨었다.

비슷한 시기에 장철훈 조흥은행장 홍세표 외환은행장이 직접 일본 싱가포르
대만 등지를 다니며 외화차입에 나섰지만 허탕만 치고 돌아왔다.

가는 곳 마다 기아문제에 대한 질문만 받았다.

"한보는 어찌되는 것인가, 정부는 어떻게 한다더냐, 당신들 부실자산부터
모두 공개하라"

이런 얘기들만 들었다.

9월22일 홍콩의 뉴월드 하버뷰 호텔에서 한국경제 설명회가 열렸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제52차 연차총회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금융연구원과 아시아 소사이어티가 공동 주최한 행사였지만 정부가 직접
로드쇼를 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이례적인 행사였다.

박영철 금융연구원장의 유창한 영어연설은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설명회장 한쪽에서는 "so what?(그래서 어떻다는 거냐)"이라는
중얼거림도 들렸다.

해외은행가들은 "정부의 지급 보증에 종금사들도 포함되는지, 파생상품은
어떻게 되는지"를 강부총리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강부총리는 진땀을 뺐다.

엄낙용 제2차관보(현 관세청장)가 나섰다.

그는 "한국정부는 금융기관들의 "모든 채무"에 대해 지급을 보증할 것"
이라고 강조했다.

해외 금융기관 대표들은 기립박수를 쳤다.

그러나 "박수는 박수, 빚독촉은 빚독촉"이었다.

"당시 IMF총회장 로비는 온통 한국문제에 대한 풍문과 질문들로 가득찼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고 생각했다"(당시 이회의에 참석한 모은행장)

IMF총회가 끝난 25일 국내금융시장은 다시 일대혼란을 맞았다.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금리와 환율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해외금융기관들은 돈줄을 더욱 죄어 왔다.

9월28일 월드컵 한일전에서의 승리로 국민들의 흥분이 채가시기도 전인
30일 "한국에서 이상징후가 발견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S&P사로부터
발표됐다.

이번에는 국가 신용도의 추락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10월3일 S&P사가 한일 신한 외환은행의 신용등급을 한단계씩 낮추면서
시작된 국내은행의 신용등급하락은 10월 한달동안 무려 네차례나 거듭됐다.

한국계 은행을 대상으로 한 크레딧라인축소 명단에는 드디어 국책은행도
포함됐다.

한여름부터 시작된 은행회관의 심야회의는 이때도 계속되고 있었지만
달라진 것은 이제는 제법 쌀쌀해진 밤공기뿐이었다.

<박기호,조일훈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