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는 새정부측의 요구사항인 대기업 회장실 기조실의 정리문제는 각사
사정에 따라 자율적으로 실천키로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11일 오후 30대그룹 기조실장회의를 갖고 회장실
기조실 정리문제를 지배주주에게 법적지위와 책임을 부여한다는 차원에서
원칙적으로 수용하되 현실적으로 기조실을 당장 없애기는 어렵다는데 뜻을
모으고 실천은 각사 사정에 맡겨 자율적으로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재계의 이같은 입장은 기조실 등의 조기정리를 요구하는 비상경제대책위의
입장과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어서 새정부측의 반응이 주목되고 있다.

이날 회의는 당초 회장단회의를 하루 앞두고 긴급 소집돼 그 배경과 결과에
관심이 집중됐었다.

그러나 큰 뉴스거리를 내놓지 못한 것 자체가 재계가 하고 있는 고민의
깊이를 보여주는 대목이란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실제로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선 정책건의제의와 함께 불만토로가
쏟아져 나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비상경제대책위 대통령직인수위 등 새정부측과 공정위 재경원 통산부
등 현정부의 경제부처가 경쟁적으로 대기업 정책을 내놓으면서 기업
관계자들의 입은 상당히 많이 나와 있었던게 사실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기업 특히 대기업이 경제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정책당국이 앞다퉈 "잘못된 경영"을 막기위한 새로운
제한조치를 내놓고 있다"며 "그 와중에서 불요불급한 제한조치까지 늘어나
기업들이 본연의 활동에 손을 못대고 있다"고 말했다.

재계가 심정적으로 거세게 반발하는 이유는 정부와 새정부의 대기업정책이
지나치게 기업의 "부담"을 늘이는 혁신조치에 집중돼 있어서다.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을 초래하는 조항도 적잖이 불거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최근 새정부측이 추진키로 한 대기업 정책의 골자를 살펴보면 이는 잘
드러난다.

<>상호지급보증축소 <>사외이사제 의무화 <>소액주주의 권한 강화 <>결합
재무제표 작성 <>기조실 내지 비서실 폐지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
(M&A) 허용 <>한계사업정리를 포함한 구조조정 계획 발표 <>오너의 경영
책임강화 등이다.

비시장경제적인 조치로 수면하로 사라진 대기업그룹간 사업교환(빅딜)도
빠뜨릴 수 없다.

대부분 재무구조의 건전화와 소유구조의 선진화를 위해서 필요한 조치들인
것은 재계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 기업에 부담을 주는 조치 일색이라데 문제가 있다.

모그룹 관계자는 "1,2월은 투자 마케팅 수출 등 각 분야에서 기업이 연중
가장 바쁜 시기"라며 "경영권방어와 결합재무제표작성 준비, 기조실 축소
등 작업에 모든 걸 뺏기고 있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예년에는 외국바이어을 촌음을 아껴가며 만나던 임원들이 국내 주주총회
대책마련에 매달리고 있다는 설명도 붙였다.

더 큰 문제는 국제표준화,선진화의 명분이 기업을 도와주는 쪽에서는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세계적으로 지주회사를 허용하지 않은 나라가 우리나라
뿐임을 잘 알고 있다면서도 허용해 주지 않은 이유를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기업의 구조조정을 가로막고 있는 덩어리 규제를 한꺼번에 없앨 수 있는
구조조정특별법 제정에 대해서 새정부측이 현정부가 그랬던 것과 똑같이
개별법 개정쪽으로 방향을 튼 것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노동시장 유연화 문제에도 재계는 할말이 많다.

재계 관계자들은 새정부의 경제정책이 기업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고
수출증대를 통한 외채조기상환이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얻기 위해선 보다
현실을 감안한 원칙적용과 일관성 유지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가능하면 비대위 활동 종료 이전인 14일까지는 구조조정 계획을 내달라는
요청에 기업들이 심정적으로 호응을 보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영설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