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7일 재정경제원 윤증현 금융정책실장의 방으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김인호 당시경제수석이었다.

"재경원과 한은이 합동회의를 좀 가집시다"는 내용.

즉시 최연종 한은부총재와 윤실장등 관계자들이 청와대로 집합했다.

격론이 벌어졌다.

IMF행 불가피론을 펴는 한은과 그래도 다시한번 노력해 보자는 재경원의
주장이 맞섰다.(한은 관계자 증언)

어떻든 일단 대통령께 상황보고를 드리자는 결론이 났다.

다음은 윤증현실장의 증언.

"아마 이날 보고서가 IMF행을 처음 제기하는 공식 보고서였을 것이다.
이 보고서를 들고 김수석과 강경식부총리가 대통령을 만났던 것으로 기억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김인호 수석의 증언도 일치한다.

김수석 역시 최근 기자를 만나 "7일의 보고서는 외환위기를 분석하고
가능한 대안을 모두 망라하는 그런 보고서였다. 물론 IMF행도 대안의 하나
였다. IMF에 지원요청을 검토하자는 대안이 거론된 첫 회의였다"고 밝혔다.

이날 주가와 금리 환율은 대란 그 자체였다.

주가는 38포인트나 폭락했고 환율은 매매기준율 기준으로도 1천원에 육박
했다.

홍콩 사태에 이은 두번째 폭락사태였다.

외환 거래는 두절상태였다.

국제시장에는 한국을 탈출하라는 사이렌은 요란하게 울려대는 중이었다.

다음날인 8일저녁 9시30분께 이날 따라 일찍 퇴근해 있던 이경식 한은총재
에게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대통령은 "이총재 도대체 어찌 돌아가는 겁니까"라고 말을 뗐다.

대통령의 목소리는 흥분을 억제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다음은 이경식 총재가 측근들에 밝힌 내용.

"대통령은 외환보유고가 정말 얼마나 되는지를 물어 왔다. 심각하냐,
얼마나 버틸수 있나 하는 질문들이었다. 설명을 다 듣고난 다음 대통령은
앞으로는 외환보유고를 금융기관 부도를 막아주는 외엔 절대로 사용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대통령은 7일 강부총리와 김수석의 보고를 받고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는
말도 덧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은 이후 이총재와 거듭되는 전화통화에서 재경원의 지시를 받지 말고
자신의 지시를 받으라는 말도 여러번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한은 관계자는
밝혔다.

한은 관계자가 밝힌 이총재의 발언중에 눈에 띄는 대목은 대통령이
"앞으로는 나의 지시만 받으라"고 말한 대목이다.

이총재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대통령은 이미 재경원의 보고와 강부총리의
업무처리를 심히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과연 그랬다.

이 시기를 전후해 대통령은 이미 강부총리를 경질할 결심을 굳히게 된다.

대통령은 이후 매일 한두차례씩 직접 전화를 걸어 왔다.

이총재가 식당에 가 있을때는 식당으로 전화를 걸어 오기도 했다.

대통령의 주된 질문은 "IMF로 언제 가느냐, 언제까지 버틸수 있느냐"는
것 등이었다고 한은 관계자는 밝혔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대통령은 이미 IMF행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각오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실무자들 사이에서도 불안감이 퍼지고 있었다.

가슴들이 바싹빠싹 타 들어오고 있었다.

윤진식 당시비서관(현 세무대학장)도 그중의 한사람이었다.

윤 전비서관은 재경원 금융정책과장과 뉴욕재무관을 역임해 누구보다 국제
국제금융시장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윤 전비서관은 국가의 명운이 경각에 달렸다고 판단했다.

앞뒤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경제수석이 아닌 김광일 특보에게 대통령과의 독대를 주선해줄 것을 부탁
했다.

다음은 당시 청와대 관계자의 증언.

"김광일 특보가 독대기회를 만들었다. 비서관의 독대보고는 계급질서를
뛰어 넘는 파격적인 것이다. 정말 이러다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냐며 심각
하게 수근대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집무실로 들어서면서 윤 전비서관은 만에 하나 자신이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대통령은 다행히 자신의 말을 몇번씩 숫자까지 확인하며 경청해 주었다.

"차라리 잘못된 판단이기를 바랬지만 모라토리엄으로 갈 경우 국민경제에
닥칠 혼란은 더욱 두려운 일이었다"고 최근 윤전비서관은 가까운 지인에게
털어 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윤 전비서관은 이날을 9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을 독대한 날이 9일이었는지 12일이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김인호 전수석은 이날을 12일로 기억하고 있다고 본보와의 접촉에서
말하기도 했다.

김 전수석은 이미 10일이전에 두차례이상 대통령에게 위기의 상황과 IMF행
을 포함한 종합적인 대처방안을 보고했었다고 강조했다.

사실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던 터라 모두가 정신이 없었다.

당시의 정확한 날자들에 관해 조금씩 틀린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은 이경식
총재도 마찬가지다.

이총재는 대통령의 전화를 받은 날이 처음에는 10일 이후라고 했다가 2차
인터뷰에서 "그날은 8일밤이었다"고 기억을 되살려 냈다.

시장은 계속 혼란이었고 더우기 11월 들어서는 금융기관들이 외화부도로
말려들고 있었다.

정부에서 외환보유고를 밀어주지 않으면 모조리 부도였다고 재경원 관계자
는 증언하고 있다.

다음은 윤증현 실장의 증언.

"11월들어 중순까지 이미 수십억달러가 은행들의 부도를 막는데 들어갔다.
월말까지는 모두 1백50억달러가 들어갔는데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막아
줄수록 더욱 많은 외채 상환 청구서가 날아들었다"

일요일인 9일밤 강부총리 이총재 김수석 등 빅3가 다시 인터컨티넨탈호텔
에서 만났다.

이제 상황은 심각해졌다.

더이상 물릴 수도 없었다.

종금사에 30억달러의 외화를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 금융시장 안정대책이
확정됐다.

IMF행도 검토됐다.

다음은 회의에 참석한 한은 관계자의 증언.

"물론 IMF행이 본격적으로 토론되었다.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재경원쪽에서는 이날까지도 여전히 미련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
한다. 강부총리는 계속 금융개혁법을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호텔에서 돌아오는 차안에서 이경식 총재는 정규영 국제부장에게 어제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던 일을 말해주고 "정말 큰일났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는 사이에도 국가부도의 시침은 계속 돌아갔다.

다음날인 10일 대통령은 강부총리와 김수석을 다시 불렀다.

운명의 날이었다.

다음은 강부총리 측근인 P씨의 증언.

"강부총리가 이날 IMF행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보고하고 1차 재가를 받았다.
이 싯점에서 재경원 고위층은 이미 IMF행을 결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김인호 수석도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김수석은 본보와의 접촉에서 "10일 대통령에게 종합적인 금융시장 안정책을
보고하면서 IMF행도 같이 보고되었다.

대통령에게 공식적으로 IMF라는 "결론"을 보고한 것은 이날이 처음하고
대통령도 "그럽시다"고 했다"고 밝혔다.

재경원은 곧바로 준비에 착수했다.

엄낙용 당시 차관보(현 관세청장) 등 실무자들은 11일 새벽 캉드쉬총재와
아태담당 국장인 휴버트 나이스에게 전화를 걸어 "그쪽으로 갈지도 모르겠다.
만일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되면 도와달라"고 말했다.

대통령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10일 강부총리와 김수석을 내보낸 대통령은 바로 홍재형, 정인용 전부총리
등 원로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음은 홍재형 전부총리의 증언.

"정확한 날자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즈음 해서 대통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사실 현업을 떠나 있기 때문에 실상을 파악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그동안 시중에서 전문가 등과 나누었던 얘기를 해드렸다.
IMF행이 불가피하냐는 질문에 자신은 그렇게 본다는 요지의 말씀을 드렸다"

재경원이 왜 국가부도의 낭떠러지에서 며칠씩 IMF행을 망설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책임회피라는 주장을 펴고 있지만 재경원쪽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다음은 김우석 재경원 국제금융증권심의관의 말.

"IMF로 갔을 때 어떤 고통이 따르는지는 누구보다 재경원이 잘 알고 있었다.
또 하루이틀 늦어진다고 사정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우리로서는 최후의
노력을 했던 것이다"

이러는 사이 시간이 다시 흘렀다.

금융기관들의 외화부도금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외환보유고도 1백억달러가 무너졌다.

이제는 IMF행 아니면 국가부도 둘중 하나의 선택뿐이었다.

13일 밤 다시 빅3가 시내 호텔에서 만났다.

강부총리가 굵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합시다. 캉드쉬 총재를 서울로 부릅시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3자회의가 끝나갈 즈음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내일 세사람이 모두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지시였다.

"이날 공식 재가가 났다. 대통령은 어제밤 3자회의 결론을 보고받고 오히려
왜 주저하느냐, 빨리가라, 서둘러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래서 이날부터
IMF행 준비에 들어갔다"고 한은 고위관계자는 밝혔다.

이제 전화통에 불이 났다.

박병원 부총리 비서실장이 워싱턴으로 전화를 했다.

재경원에서 IMF 대리대사로 파견나가 있는 권오규 이사가 받았다.

당시 캉드쉬는 아시아 순방중 인도네시아에 머물던 중이었다.

캉드쉬총재는 "기다리고 있었다"며 전화를 받았다.

이날 오후엔 김기환 순회대사가 조용히 워싱턴발 비행기에 올랐다.

(정규재 하영춘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