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임창열 부총리겸 재정경제원장관, 김원길 국민회의정책위의장 등과
함께 아침을 먹은 5대그룹 기조실장들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마치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가 야단을 맞는 학생들과 같은 표정이었다.

이들 뿐만 아니다.

구체적인 구조조정계획을 새대통령 취임 이전에 내놓으라고 했다는 회의
내용을 전해들은 재계 인사들은 대부분 고개를 가로 저었다.

새정부측이 이처럼 서두르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모그룹의 한 임원은 "주력계열사의 초일류화계획을 담은 구조조정안은 한
그룹의 비전이나 생존전략과 관계있는 것"이라며 "그것을 구조조정 의지나
성의와 연계시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장기적인 경기예측과 사업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주력업종을 확정짓는
것 자체가 어렵거니와 확정짓는다고 해도 그것을 공개한다는 것은 기업생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또 다른 그룹의 관계자도 이런 상황에서 대기업들이 내놓은 구조조정계획에
대해 "성의가 보이지 않는다"거나 "알맹이가 빠졌다"는 비판을 하는 것은
문제를 더욱 꼬이게 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재계가 떨떠름해하는 것은, 그러니까 새정부측이 내준 숙제가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고 있는 탓이다.

그리고 이 판단은 이날 조찬회동에서도 재확인된 것이다.

그렇다고 이날 조찬모임이 재계에 짐만 지워준 것은 아닌 것 같다.

문제가 된 총수의 사재출연이나 "빅딜"과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기업의
입장을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문호 LG회장실 사장은 사재 출연이 본질이 아니며 기본 원리에도
어긋난다는 기조실장들의 지적에 대해 임부총리도 동의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그룹의 기조실장은 그룹별 주력사업을 확정짓는 소위 빅딜에
대해서도 정부가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전했다.

새정부측이 이들 문제에 대해 경직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니
재계로서는 나름대로 짐을 던 것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구체적인 구조조정 계획의 발표가 당초 "가능하면 빨리"
에서 새대통령 취임전으로 사실상 늦춰진 것도 이날 조찬회동의 한 성과로
보고 있다.

30대에 속한 대부분 그룹들이 언제 내놓으라고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태에서 어쨌든 일정이 확정됐기 때문이다.

재계는 그러나 이날 회동을 통해 새정부측이 추진중인 대기업 개혁이
전시성이거나 일회성의 정책이 아님을 재확인했다.

현실적으로 어렵든 쉽든 새정부의 개혁의지를 뒷받침할 "진정한 성의"를
보여야 하는 과제를 다시 부여받았다는 얘기다.

<권영설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