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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기업 불망'' ''삼성 불패''의 신화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건희 삼성그룹회장은 올해초 전체 임직원들 앞에서 이같은 "자기부정"
으로 신년사를 시작했다.

국가부도상황을 걱정할 정도로까지 추락한 한국경제의 현주소.

그 뒤에는 낙후된 금융시스템이 있었고, 관료들의 무능이 있었으며,
경영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대기업 그룹의 착각이 있었다.

올해 재계의 키워드는 경영패러다임의 변화다.

물론 그 시발점은 한국경제의 외환위기와 그로 인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다.

밖으로부터의 강요된 변화이긴 하지만 이미 변화는 시작됐다.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한 생존의
문제로 부상했다.

"금융 빅뱅(Big Bang)" 못지 않는 "산업 빅뱅"이 재계에 몰아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기업의 소유구조에서부터 대폭적인 수술이 불가피해졌다.

대기업 그룹의 계열사간 빚보증은 점차 축소돼 내년부턴 전면 금지될
전망이다.

또 결합재무제표작성이 오는 2000년까지 의무화되고 회계기준도 재정비된다.

기업내부적으로는 매출이나 순익보다 현금의 흐름을 중시하는 경영패턴이
자리잡지 않을 수 없다.

그룹간 사업교환과 구조조정은 필연적이다.

정리해고 도입도 시간문제고, 외국인의 부동산취득까지도 가능해져 해외
자본에 M&A(매수합병)되는 기업들도 상당수 생겨날 것임에 틀림없다.

세계시장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경제의 추락은 새로운 시장경제 질서에
대한 적응 실패다.

그래서 미국 MIT(매사추세츠공과대학)의 폴 크루그만 교수는 "현재 한국
경제의 위기는 시스템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IMF의 요구조건도 다르지 않다.

"차입경영과 선단식 경영으로 대표되는 한국식 발전모델을 폐기하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체질을 변화시키라"(미셸 캉드쉬 IMF총재)는 주문이다.

세계시장내에선 한국기업의 불공정경쟁과 무임승차가 불가능해졌다는
의미이며, 한국기업에겐 "게임의 룰" 자체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분명 한국의 재계는 지금 "창조와 파괴"의 기로에 서있다.

IMF체제는 그간 당연시했던 각종 관행과 사고방식을 깡그리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엇을 파괴하고, 어떤 것을 창조해낼 것인가에 대한 논의다.

국가사회 전반의 고비용.저효율은 가장 먼저 깨져 나가야 할 부분이다.

건전한 기업.좋은 기업에 대한 개념정립도 새롭게 이루어져야 하며,
경영자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도 새로운 잣대가 필요해졌다.

한국경제의 당면과제는 물론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새로운 틀,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논의도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부도 직전까지 갔던 값비싼 대가를 지불한 의미가 없다.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과거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단절적
사고 역시 피해야 한다.

현재의 기업체제는 한국경제의 발전과정에서 만들어진 역사의 산물이며,
그 과정에서 경제 활력의 모티프로 작용한 것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선은 시장경제의 논리일 수밖에 없다.

"기업의 자율적인 경영체제 개편을 유도하고 궁극적으로 시장의 힘이
체질개선을 강제하도록 만드는 식"(김대중 차기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문제해결방식조차도 과거의 단선적 사고에서 입체적 사고로 전환돼야
함을 의미한다.

기업의 대변신은 이미 시작됐다.

단적으로 기업의 재무제표 읽는법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성장에서 수익으로", "망라주의에서 선택적 집중으로", "스톡
에서 플로우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구축된다.

과거의 잣대만으론 새시대, IMF시대를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의철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