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건널 때는 말을 바꿔 타지 않는다"

29일 현대그룹의 정기임원 인사로 마무리된 주요 대기업그룹 연말 인사의
특징이다.

사장단 등 최고경영진의 승진 및 전보 인사가 예년에 비해 아주
소폭이었다는 얘기다.

당초 재계에서는 사상 최대의 불황과 국제통화기금(IMF)한파 등으로 인해
각 그룹이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하면서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를 단행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각 그룹들은 이와는 반대로 조직의 안정과 원로들의 경륜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위기관리를 위해 모험을 걸기보다는 "구관이 명관"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택했다는 것이다.

이는 바뀌 말하면 각 회사가 겪고 있는 경영난은 해당 회사의 최고경영자나
임원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외부적인 요인이 강하고 그런만큼 극복책도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더 잘 발견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현대 삼성 LG 대우 선경 등 5대그룹의 경우 사장단 인사는
예년수준에도 못 미치는 정도로 모두 소폭에 그쳤다.

선경의 경우는 사장단 이상급 인사는 SK주식회사 선경증권 선경유통
워커힐 등 4개 계열사에 한정됐다.

또한 LG와 대우, 선경등은 조직의 동요를 막고 비상체제를 선포하는
의미에서 임원인사를 아예 유보하거나 승진인사를 동결하는 등 보수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번 인사에서 각 그룹의 살림살이를 책임지고 있는 기조실장이나
비서실장의 변동이 거의 없었다는 점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부 대기업그룹들이 현직에 있는 사람에게 "1년 더" 기회를 주는 동시에
비교적 젊은 "로열 패밀리 멤버"들을 전진 배치시켜 계열사 장악력을 높인
것도 올 연말 인사의 눈에 띄는 특징이다.

현대그룹이 정주영 명예회장의 막내아들인 정몽일 현대종합금융사장을
대표이사 회장으로 승진시킨 것과 LG가 구본무 그룹회장의 둘째 동생인
구본준 LG반도체전무를 대표이사로 선임한 것도 같은 케이스.

또 선경그룹이 최종현 회장의 장남 최태원 SK주식회사 상무를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승진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밖에 한솔그룹이 최동혁 동만 동길 등 오너인 이인희의 세 아들을
부회장으로 전진배치한 것과 새한그룹 이재관 새한미디어사장의 미디어부문
부회장 승진, 거평그룹 나선주 기조실장의 부회장 승진 등도 예상보단 빠른
조치였다.

모그룹 관계자는 이같은 경향에 대해 "위기일 수록 실질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오너들이 그룹경영을 다잡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작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와 함께 세계경영과 수출총력체제를 위해 해외에 파견되는 최고경영진도
적지 않았다는 점도 예년과는 달라진 점이다.

대우그룹은 24명을 지역본사 사장으로 발령했고 삼성그룹은 이승웅
삼성물산 대표이사 부사장을 중남미총괄 대표이사 사장으로 발령하는 등
4명의 대표이사 부사장을 해외에 배치했다.

이밖에 보수적인 인사로 다소 느긋해진 조직의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각 그룹별로 실적을 바탕으로 한 발탁인사를 실시한 것과 LG와 대우그룹처럼
세대교체를 단행, 대표이사그룹의 연령을 50대 초반으로 끌어내린 점도
올해인사의 또 다른 특징으로 꼽힌다.

<권영설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