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도해도 너무한다.

우리 기업들이 이렇게 힘이 없었단 말인가.

지진을 당하듯 우수수 허물어지다니.

지난 한주를 돌아보자.

산내들인슈 이지텍 가파치 등 튼튼하기로 이름난 기업들조차 힘없이 주저
앉았다.

이제 쟁쟁한 대기업들도 위험을 피하지 못해 동분서주한다.

도대체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단 말인가.

그토록 생산성향상을 게을리했던가.

아니면 수출활동을 등한시했나.

그것도 아니라면 자금관리를 포기했기 때문인가.

거듭 눈여겨봐도 IMF협약이후엔 부채비율이 아주 낮은 기업들도 갑자기
좌초한다.

남달리 기술개발에 힘을 쏟던 기업들까지 흑자부도에 휘말렸다.

아직 살아있는 기업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김포에 있는 오성플라스틱산업의 이명렬 사장은 2천3백만원짜리 진성어음을
들고와서 기자에게 내보였다.

거래은행에 이 어음을 가져 갔더니 며칠만 더 기다리라고만 했단다.

이 어음을 현금으로 바꿔야 월급을 줄텐데 참 아득하다고 하소연했다.

어음할인에 필요한 서류를 다 냈고 할인한도도 6천만원가까이 남아 있는데도
며칠만 더 기다리랄 뿐 현금화를 해주지 않는단다.

이대로 가다간 돌아오는 어음까지 못막아 연말을 넘기기 힘들거라고
덧붙였다.

이렇게까지 돈흐름이 완전히 멈춰 버린 건 처음 보는 일이다.

시중자금이 이렇게 꽁꽁 얼어붙은 상황에서 "돈흐름을 잡아라"란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의 마음도 정말이지 괴롭다.

대체 돈이 조금이라도 흘러야 잡을게 아닌가.

그래서 지난 한주동안은 그룹기조실 금융가 증권가 기업연구소 등을
찾아다니며 각종 뜬소문들을 다들어봤다.

이 "자금전쟁"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를 나름대로 판단해 보기 위해서
였다.

일단 여러곳에서 들은 뜬소문들을 얘기해 보겠다.

이건 어디까지나 뜬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업계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인 만큼 어떤 부분은
필요할는지도 모른다.

시중에선 이렇게 얘기한다.

IMF 세계은행의 자금이 풀려도 환율과 증시가 안정되는덴 약간의 시간이
더걸릴 거란다.

왜냐하면 한국에 투자하려는 외국자본은 고환율과 자금난에 못이겨 상당
수의 기업들이 무너질때까지 기다리기 때문이라는 것.

다시 말해 외국자본들이 우리의 "알짜배기" 기업에만 자본참여를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주식시세가 떨어지고 환율은 높으니 아무리 알짜배기 기업이라도 외자
앞에선 무력할 수 밖에. 이밖에 "오적론" "일본위험론" "국위선양론"
"그룹가지치기" 등 다양한 소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만 IMF 지원에도 환율이 갈대로 다 간 뒤 외자가 들어오기 시작해야
자금전쟁이 가라앉을 거란데는 대부분이 같은 말을 했다.

그렇다면 외국자본이 다시 우리나라로 몰려 들어오기 시작하는 시점은
언제쯤일까.

대부분이 내년 2월은 돼야 한다는 얘기였다.

하루를 버티기도 힘든데 한달반 이상을 기다리라니.

그렇지만 이럴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무엇보다 살아남는 것만이 최고다.

자금관리란 본디부터 기업의 생존수단이다.

따라서 앞으로 두달간은 이익이 나지 않더라도 매일매일 먼저 돈이 들어온
다음에야 돈을 내보내는 전략을 짜야 한다.

현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새로운 거래를 펴지 않는게 좋다.

몸을 숨기는게 상책.

거듭 강조하지만 전쟁으로 융단폭격을 당할 땐 방공호에 잠시 숨는 것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가장 현명한 일이다.

이치구 < 중소기업 전문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