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환경의 불안이 심화되면서 기업들이 사업방향에 갈피를 못잡고 있다.

기업들은 당장 내년도 사업계획을 작성중이지만 금융시장의 불안, 기아
사태의 장기화, 환율급등, 증시추락 등 모든 변수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투명해지고 있다.

여기에 대선정국이 비자금사태로 번지는등 정치 불안이 거듭되면서 기업들
은 혼돈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우선 기업들이 가장 혼란을 겪고 있는 부분은 자금조달에 대해 어떤
스케줄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

직접자금조달이 갈수록 어려워지면서 증자나 회사채 발행 계획이 오리무중
상태에 놓여 있다.

올해 5대그룹의 유상증자 한도는 1조4천9백75억원.

그러나 이들 기업이 이미 실시했거나 연말까지 실시하기로 한 유상증자
규모는 5천9백71억원에 불과하다.

5대그룹의 증자에 증시자금이 지나치게 편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설정한
한도가 올해 불과 40%밖에 소진되지 못했다는 것은 증시가 기업의 자금조달
창구로서의 기능을 잃었다는 증거다.

5대그룹이 그렇다면 나머지 기업들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다.

"연초부터 한보사태 등으로 줄곧 눈치만 살피다 증자시기를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는게 기업 자금담당자들의 설명이다.

문제는 내년에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입경영을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탈출구가 막히고 있어 기업의 구조조정
노력이 허사가 되고 있다"는 불만도 빗발치고 있다.

해외 기채도 길이 막혀 있기는 마찬가지다.

국가 신인도 추락으로 대부분 기업들이 해외에서 자금을 끌어들이는데
애를 먹고 있다.

삼성그룹은 내년에 반도체 시설투자 등에 사용하기 위해 해외 CB나 DR를
대량으로 발행할 계획이다.

그러나 "국가 신인도 하락에 최근의 주가 폭락으로 상당한 차질이 생길 것
같다"는게 관계자들의 우려다.

이 상태라면 해외증권을 발행해도 할인율이 턱없이 올라갈 것이고 일반
자금의 조달금리도 치솟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벌써 해외차입때 리보+0.3%의 금리를 적용받던 기업이 리보+1.5%에도
조달이 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중견기업들은 더 심각하다.

증자는 아예 꿈도 꾸지 못하고 있고 회사채 발행도 보증을 서주겠다는
곳이 없다.

지난달 회사채 미발행률이 50%에 육박해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다 보니 중소기업의 회사채 발행이 전체 회사채 발행 규모에서 차지
하는 비중이 처음으로 10% 아래로 떨어졌다.

아예 이달에는 발행 신청물량 자체가 큰폭으로 감소했지만 미발행률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게 관계자들의 전망이다.

한은이 환율방어를 위해 금리상승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
이다.

자금조달이 돼도 간접금융을 통하게 되는만큼 조달금리 상승은 불가피하다.

결국 수익성 저하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신규 프로젝트의 연기는 당연하다는 분위기다.

그러나 더 큰문제는 특별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LG그룹 관계자는 "그룹내 사정으로 자금조달이 어렵다면야 부동산매각 등
자구계획을 짜겠지만 경제상황 정치상황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문제가
발생하고 있어 속수무책"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비자금 폭로전으로 번지고 있는 대선정국이 큰 부담이 되고 있다.

폭로과정에서 명단이 공개된 기업들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기업도
"안그래도 어려운 경제에 또다시 찬물을 끼얹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 김정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