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기관이 흔들린다.

종금사 등 제2금융기관만이 아니다.

은행마저 존립기반을 위협받고 있다.

금융자율화의 진전으로 가뜩이나 이익기반이 엷어진 상황에서 한보를
필두로 삼미 진로 대농 기아그룹 등이 줄줄이 부실화되면서 금융기관들이
덩달아 부실화대열에 합류했다.

특히 기아그룹의 사실상 법정관리결정으로 은행들은 당장 올연말 무더기
결산이 불가피해졌다.

종금사들도 4조여원의 돈이 장기간 묶이면서 수지는 물론 유동성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됐다.

기아사태가 장기화되고 대기업부도가 쉽게 진정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일반적임을 감안하면 이제 금융기관들은 생존의 기로로 내몰리게 됐다.

금융기관의 집단 부실화는 내년으로 예정된 외국은행의 국내진출자유화 등
금융시장개방일정과 맞물려 금융기관 M&A(인수합병)를 앞당길 공산이 커지고
있다.

은행 등 금융기관의 집단 부실화는 일시적이 아니라 구조적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90년대들어 본격 추진된 금융자율화로 금융기관들은 각종 리스크에 고스란
히 노출됐다.

일본 등 외국에서 부동산버블해소 등으로 금융기관 M&A바람이 일고 있을때
국내 금융기관들은 "부동산신화"만 믿고 위험자산을 과도하리만큼 늘려왔다.

주인없는 은행의 경영을 책임질 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와
정치권이 은행경영에까지 손을 뻗치다보니 수익성이란 개념은 실종되고
말았다.

그 결과가 바로 집단 부실화다.

은행들의 경우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은행감독원이 발표하는 부실여신(회수의문+추정손실)만 해도 지난6월말
현재 4조9천3백96억원에 달한다.

기아 진로 대농 등의 부실여신까지 포함되는 연말에는 8조원을 웃돌
전망이다.

더욱이 6개월이상 연체중인 고정여신까지 포함하면 은행불건전여신규모는
지난 6월말 17조8백88억원에 달한데 이어 올연말에는 40조여원에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은행총여신(3백10조원)의 13%가량에 대해 한푼의 이자도 받지 못하는
셈이다.

여기에 기아의 법정관리로 인한 대손충당금 추가적립부담(3조여원예상)까지
감안하면 올 연말결산에서 흑자를 낼 은행은 불과 2~3개에 그칠 것이란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종금사도 마찬가지다.

종금사들이 기아에 빌려주고 있는 여신만 3조9천5백억원에 달한다.

이는 30개 종금사의 총자기자본(3조9천7백억원)과 맞먹는 규모다.

극단적으로 말해 기아여신이 모두 부실화될 경우 종금사 전체의 자기자본을
잠식하게 된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보험사와 신용금고들도 다르지 않다.

고만고만한 기관들이 우후죽순으로 난립된 상황에서 수익성을 기대하는건
어렵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쉽게 해소될 것 같지 않다는데 있다.

부실채권정리를 맡은 성업공사가 제기능을 발휘한다해도 거대한 부실여신을
일거에 해소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다른 대기업이 추가부도라도 낼 경우 금융기관들은 헤어나지 못할
수렁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되면 은행 등 금융기관들은 당장 M&A의 기로로 내몰리게 되고 국내
금융산업은 극심한 재편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란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 하영춘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