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기업들이 미국 기업의 장점에 눈을 돌리고 있다.

기업 "벤치마킹"의 주요 표적으로 미국식 경영시스템이 급부상하고 있는
것.

반면 지금껏 모범사례로 인식돼 온 일본기업들은 한발짝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국내기업의 경영 교과서가 도요타에서 포드로, NEC에서 인텔로, 소니에서
제너럴 일렉트로닉으로 "탈 일본, 입 미국"화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기업 본받기에 가장 활발한 기업은 LG그룹을 꼽을 수 있다.

LG는 아예 미국의 "GE"를 공개적인 스승기업으로 삼을 정도다.

구본무 그룹회장의 경영 키워드인 "선택과 집중", "수익성없는 품목은
과감히 버린다" 등은 바로 젝웰치 GE회장의 "넘버 1, 넘버 2"전략을
벤치마킹한 것.

LG그룹이 국내 그룹중 최초로 도입한 "사내 벤처제" 역시 전형적인 미국식
경영에서 나온 발상이다.

구회장이 지난해 말 직접 사장단을 이끌고 GE, 존슨&존슨, 엔론 등 미국의
초일류기업을 돌아볼 때도 "미국 기업의 장점에 주목하라"고 강조했다.

일본식 관리방식에 젖어있다는 평을 듣는 삼성그룹도 최근 "탈 일본"의
움직임이 뚜렷하다.

대표적인 예가 올해초부터 삼성이 전계열사 차원에서 벌이고 있는
"스피드경영".

"먼저 제때 빨리 자주"를 표방하는 스피드경영은 결국 미국기업을
"벤치마킹"하자는 내용이다.

삼성이 꼽는 세계 최고의 스피드기업은 바로 미국의 인텔이며 이밖에
모범기업으로 선정된 시티뱅크 월마트 GE 등도 하나같이 미국기업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미국과 일본의 CEO를 분석한 자료에서 "일본
기업의 최고경영자는 미국베끼기에 급급하고 있다"며 "체계적인 CEO육성
시스템을 갖고 있는 미국식 경영시스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포철은 경영혁신의 벤치마킹 기업으로 일본의 신일본제철이 아닌 미국의
뉴코어사를 선정, 주목을 받고 있다.

뉴코어는 외형상으로는 미국내 4위에 불과하지만 극심한 불황기인 80년대
오히려 높은 수익성을 올린 독특한 기업.

포철은 지난해 이후 비철강분야로의 사업다각화전략(신일본제철)대신
"힘이 있을 때 핵심업종을 더욱 강화한다"는 뉴코어식 경영전략을 채택해
짭짤하게 재미를 봤다.

포철이 올해 상반기 사상최대의 순익(5천4백억원)을 기록한 것도 뉴코어식
벤치마킹의 한 단면이다.

금융권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신금융그룹 양재봉 회장은 최근 종신고용 연공서열제 등을 중심으로 한
일본식 경영을 강도높게 비판하고 "미국식 경영시스템을 연구하라"고
임원들에게 지시했다.

또 그룹 후계자인 양회문 부회장을 미국으로 출장보내 선진금융기법을
배우고 오도록 지시했다.

대신금융그룹은 출범때부터 일본의 노무라증권을 벤치마킹하는 등 일본식
경영에 철저했던 기업.

따라서 이는 탈일본 경영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힌다.

왜 이같은 역전현상이 일어나고 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아메리캐피탈리즘(미국식 자본주의)의 부활때문이다.

80년대말의 극심한 불황을 뼈를 깍는 구조조정으로 일으켜 세운
미국경제의 저력을 국내 기업들이 새롭게 주목하기 시작한 것.

또 한가지 이유는 국내기업들이 일본식 관리혁명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의 기존 틀을 유지하면서 "쥐어짜기식 관리"로 불황을
이겨낸 게 일본기업이었다면, 대량해고 고용조정 등 "판"을 바꾸는 급진적인
방법으로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게 미국식 혁신이다.

지난해 이후 불어닥친 유례없는 불황속에서 국내기업들은 경영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화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는 곧 "탈 일본" 경영의 밑거름이
됐다는 뜻이다.

결국 재계의 미국기업 "벤치마킹"은 국내 기업경영의 패러다임 변화를
시사하는 전주곡인 것이다.

<이의철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