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봉무동에 있는 세일테크의 김인석사장(46)은 지난 95년 9월 비장한
각오로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마음속으로 그는 이번이야말로 마지막 기회라고 다짐했다.

그의 일행은 문희갑대구시장을 단장으로한 11명의 유럽시장개척단.

남선알미늄 성우광학등 대구지역 유명기업의 대표들과 함께였다.

종업원 4명의 병따개업체 사장으로서 이들 유명기업인들과 함께 떠나자니
처음엔 다소 위축됐다.

그렇지만 꼭 유럽에서 와인 병따개 수출선을 잡아야겠다는 집념 때문인지
위축감은 금새 사라졌다.

비행기에 오르면서 지난 6년간 오직 병따개 개발에만 매달려온 긴 시간을
생각하자 가슴이 저렸다.

민속공예품을 만들던 그가 병따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 89년초.

국내 주류회사가 오프너를 주문해오면서부터였다.

이때 그는 "아참, 와인병따개를 만들면 전세계시장에 수출할 수
있겠구나"라며 단순하게 판단을 내렸다.

이렇게 쉽게 시작한 오프너개발이 6년이나 걸릴줄이야.

와인오프너는 스크류를 만드는 기술만해도 매우 정교해야 했다.

강도가 뛰어나야 하는데다 각도가 나쁘면 코르크가 깨졌다.

2년쯤 지나자 기술개발은 그런대로 유럽제품을 따라잡을 수 있었으나
디자인이 문제였다.

신제품을 개발했다는 자신감으로 유럽시장에 들고가봤자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각지역에 따라 병따개의 선호도가 그렇게 다를 줄은 몰랐던 것.

실제 남아프리카공화국사람들은 검은색과 흰색 손잡이의 병따개만 사갔다.

칼러오프너는 손도 대지 않았다.

영국에선 병마개의 알루미늄막을 제거하는 포일커터가 달려야팔렸다.

그가 그동안 개발한 병따개 모형은 모두 28가지.

모두 특허를 출원했다.

이들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그는 와인병따개를 개발하는데 전재산을
털어넣고 말았다.

대구시 유럽시장개척단이 현지에 도착, 독일과 프랑스등을 돌아도
김사장에겐 납품기회가 오지 않았다.

여전히 품질은 괜찮지만 디자인이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끝장이란 생각까지 머리를 스쳤다.

일행들이 저녁식사를 나갈때도 그는 호텔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고민에
잠겼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고민에 차있는 그에게 예상치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영국기업인과의 상담회에 나온 바이어 한사람이 그의 병따개를
만지작거리면서 관심을 가지는게 아닌가.

그는 긴장했다.

이때를 놓치면 안된다는 일념으로 차근히 설명했다.

보통 와인따개는 5번을 돌려야 하지만 이 제품은 3번만 돌리면 딸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참을 살펴보던 그는 손잡이의 색깔을 초록색으로 바꿔주면 사가겠다고
했다.

바이어의 명함을 받고보니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롯백화점이
구매담당자였다.

그가 1차로 주문한 물량은 34만달러어치.

주문서를 받고 김사장은 기쁨에 들떴다.

오랜 체증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호텔에 돌아오면서부터 다시 고민에 휩싸였다.

손잡이를 초록색으로 바꾸려면 또 돈이 필요해서다.

귀국길이었다.

주문을 받고도 우울해하는 김사장에게 문희갑시장이 말을 걸어왔다.

무슨 고민이 있느냐는 거였다.

머뭇거리며 그는 간신히 사실을 설명했다.

얘기를 들은 문시장은 은행대출을 하는데 개인보증을 서주겠다고 했다.

해롯백화점에 납품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려지자 일본 스위스 오스트리아등
각국에서 주문이 대거 몰려들어왔다.

이달엔 프랑스에도 병따개를 선적한다.

이제 올가을이면 파리의 호텔에서 세일오프너로 딴 와인을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중소기업 전문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