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부도방지협약이 적용된 모 그룹 기획팀의 A씨.

입사 6년차인 그는 요즘 고민이 많다.

회사사정이 어려운 만큼 주변분위기가 뒤숭숭한 것은 당연한 일.

이참에 큰 마음 먹고 유학을 떠날까 생각도 해봤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모든게 불확실하니 당분간은 회사에 몸을 담고 있는 게 최선일지 모른다.

하지만 도무지 일에 신이나지 않는다.

A씨처럼 기업사회에는 요즘 꿈을 잃은 "샐러리맨"들이 늘어나 경영인들의
새로운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방관적인 자세, 의욕 없는 태도로 주어진 일만 하는 일명 "갤러리맨
신드롬"이다.

골프 관람객을 칭하는 "갤러리"에 회사원들을 빗댄 표현이다.

기업입장에서는 이들 겔러리 맨 신드롬 추방을 위해 극기훈련이단
집단캠프다하여 묘책을 짜내지만 한가지 분명한건 이런 풍조가 계속
확대되는 추세란느 점이다.

여건이 어려운 기업 뿐만 아니라 비교적 괜찮다는 기업들도 "갤러리맨"
신드롬을 앓고 있다.

모 국책은행에서 20년째 근무하고 있는 박모부장(47)의 유일한 꿈은
무사히 정년을 맞는 것이다.

더이상 승진이나 높은 보수에 대한 기대는 버린 지 오래다.

올라갈 자리는 없고 후배들은 치고 올라오고 자신은 그저 팔짱만 낀
구경꾼으로 자족하고 있다.

국내 굴지의 S전자사 소프트사업팀에선 올들어 3명이 회사를 그만뒀다.

개인마다 사직서를 낸 사정은 달랐지만 회사일에 적응못한 "따로따로"
분위기 탓이 컸다는 게 주변관계자들의 지적이다.

기업사회가 갤러리맨 신드롬에 시달리고 있는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기업을 둘러싼 환경이 크게 변했기 때문이다.

샐러리맨의 중추인 과.부장의 대부분은 외형위주의 성장에 익숙했던
이들이다.

때가 되면 승진도 "척척" 하고 조금만 열심히 하면 상사로부터 인정도
받았다.

기업이 커가는 만큼 자신도 성장했다.

적어도 선배들의 모습은 그랬다.

그러나 상황은 최근 2-3년 동안 크게 달라졌다.

외형위주에서 내실위주로, 고성장시대에서 저성장시대로 기업경영의
패러다임이 변화한 것.

따라서 기존 사고방식의 샐러리맨들은 급속히 자기정체성을 잃었다.

승진은 커녕 있는 자리마저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신세가 됐다.

대기업들마저 부도로 넘어지는 판이며 설령 부도가 나지 않더라도
감량경영이다, 조직개편이다, 인력재배치다, 팀제다 해서 언제 어떻게
자리가 바뀔 지 모른다.

게다가 능력급제 연봉제 등의 도입은 샐러리맨들의 목을 더욱 더 죄여
들어온다.

이래저래 피곤한 신세다.

그저 있는 자리나 지키고 보자는 보신주의, 가만히 있으면 평균은 한다는
소극적인 자세가 자신도 모르게 행동을 지배한다.

여기다 정치권의 기업 평하 현상은 경영인은 말할것도 없고 셀러리맨들의
의욕마저 잃는다.

자기가 일하는 기업이란 집단에 대한 자긍심을 잃게하는 정부의 기업에
대한 시각, 메스컴의 무절제한 대기업 관련 보도도 마찬가지다.

기업내부의 안사적체도 큰 몫을 하고 있다.

경총에 따르면 대졸사원이 입사해 부장으로 승진하는 데는 평균 19년,
임원이 되는 데는 24년 정도가 걸린다.

지난 90년 똑같은 조사에선 부장 15년,임원 19년이었다.

평균 4년이 늘어난 것.

문제는 기다린다고 승진이 보장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연공서열의 파괴, 능력제의 확산 등으로 시간마저 더이상 샐러리맨의
편이 아니다.

신세대 직장인들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LG-EDS의 20대 직장인 4명중 3명은 자신이 최고로 올라갈 수 있는 직위가
"부장"이라고 답했다.

또 37%가 앞으로 직장에 다닐 수 있는 시간이 5-10년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으며 18%는 5년 이내에 회사를 떠날 것으로 예상했다.

절반 이상이 직장 생활 10년을 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경제성장의 한축을 맡았던 화이트 칼라,샐러리맨들이 "갤러리맨"화하는
것은 국가경제 전체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샐러리맨은 기업의 경쟁력인 동시에 거울이기 때문이다.

"갤러리맨 신드롬"은 패러다임 변화를 겪는 한국기업의 자화상인 동시에
고민인 셈이다.

< 이의철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