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 기아사태등 잇단 대기업그룹의 부도사태에도 불구, "당사자 책임"을
주장해온 정부의 태도가 변하고 있다.

재정경제원은 지난 12일 기아협력업체에 대한 추가자금지원 방안을 발표
한데 이어 이튿날인 13일에는 제일은행에 대한 지원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
했다.

재경원이 특정은행의 자금난과 관련,구체적인 지원방법까지 거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아그룹 처리원칙도 다소 바뀌고 있다.

재경원고위관계자는 이날 "기아그룹이 뼈를 깍는 자구노력을 한다면 현
경영진의 퇴진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밝혀 김선홍회장이 물러나지
않더라도 여기에 상응하는 성의표시가 이뤄질 경우 채권금융단의 자금지원이
일부나마 제공될수 있음을 시사했다.

한국은행쪽에서는 12일 정부대책회의에서 거부했던 총액대출지원을 곧
시행하겠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같은 변화는 지난주 개각이후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교과서에 나오는 시장경제원리만을 앞세운채 구체적인 금융시장
안정조치를 취하기는 커녕 지원불가 논리만을 고수, 재계의 반발을 샀던
강경식 부총리는 <>경기부진 지속 <>기업및 금융기관의 경영난 심화등
문제점이 확대되고 대선이 가까워지자 경제계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유연성을 보이고 있다.

강부총리는 자신의 입장을 일주일만에 수정,기아협력업체에 대한 지원조치
를 편데 이어 제일은행의 국제금융업무가 마비되는등 파산직전의 위기에
처하자 대변인을 통해 정부는 "빅브라더"로서 금융기관이 망하는 꼴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했다.

이같은 강부총리의 태도 변화 요인에는 청와대고위층으로부터 현실경제의
어려움을 잘 챙기라는 당부를 받은 것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재경원발표의 실질적인 요인은 전세계 투자자들에게 투자판단 자료를
제공하는 미국의 S&P사가 제일은행의 재무구조가 단기적으로 개선될 가능성
이 적을 경우 신용등급을 낮추기로 한데 따른 것이다.

일단 정부의 강력한 지원의지 표명으로 빠르면 이달중 결정될 신용등급의
하락을 피하자는 것이다.

만약 제일은행 등급이 낮아지면 외화차입업무가 사실상 전면 중단, 은행
으로서 존립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릴수 있으며 이경우 한국의 대외신인도
하락은 물론 한보 기아그룹등에 거액을 물린 다른 국내 은행의 신인도가
무더기로 동반하락할수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재경원 실무자들은 제일은행 지원이 현실화되려면 넘어야할 산이
적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한은 특융및 정부의 지급보증은 결국 국민의 부담으로 이어지는 만큼
제일은행도 부실경영에 따른 임직원 퇴진등 부도유예협약대상기업에 상응
하는 자구노력을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제일은행에 대한 특융지원이 세계무역기구규정에 특별히 위배되지
않지만 기아그룹에 대한 저리보조금 간접 지원이라는 시비를 빚을 소지가
있음도 유념하고 있다.

이와함께 다른 은행도 경영이 악화되면 제일은행 선례에 따라 정부가 지원
해야 한다는 부담도 따르게 된다.

재경원은 이같은 문제를 감안, 제일은행에 대한 한은 특융의 경우 법률상
의무는 없지만 국회에 동의를 받아 정치권과 책임을 공유한다는 방침이어서
설령 지원원칙이 확정된다해도 실질적인 자금 지원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 최승욱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