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 지경까지 몰렸나"

부도방지협약에 몰린 기아그룹을 보며 내뱉는 자동차업계의 자탄이다.

기아 계열사가 발행한 사모 전환사채(CB)를 매입하는 방법으로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던 현대 대우 등 업계는 "동업자"의 위기에 망연자실한 분위기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주목할 것은 "올 것이 왔다"는 시각이 결코
소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무한경쟁"이라는 용어가 무색할 정도로 끝모르는 내수 경쟁, 수익성을
무시한 밀어내기식 수출이 언젠가 자동차산업을 벼랑으로 내몰 것이라는건
이미 충분히 예상돼 왔기 때문이다.

자동차업계의 어려움은 생산현장에서 쉽게 느낄수 있다.

지금 국내 자동차공장 가운데 제대로 돌아가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업계 맏형격인 현대자동차부터가 그렇다.

현대는 조업단축과 무이자할부라는 극약처방을 써가며 재고를 털어버리려
했지만 아직도 울산의 일부라인은 잔업이 중단돼 있다.

아산공장과 전주공장은 애시당초 공장 준공때부터 잔업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다.

부도방지협약 대상이 된 기아자동차도 소하리공장의 아벨라 생산라인은
아예 2교대 작업을 포기했다.

가동시간이 20시간에서 10시간으로 줄어든 것이다.

상용차업체들은 더 하다.

아시아자동차나 쌍용자동차의 대형상용차 라인은 조업시간을 단축한지가
이미 오래고 중소형 상용차라인도 뒤를 따르고 있다.

자동차 공장을 건설하는데는 대규모 자금이 투입된다.

양산효과를 기본으로 하는 업종이니 단위자체가 클 수밖에 없어서다.

그렇다고 무작정 투자규모를 늘릴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자동차공장의 생산능력은 8시간의 정상근무와 2시간의 잔업을
2교대로 하는 풀가동을 원칙으로 계산해 책정하는게 정석이다.

고정비 회수의 개념도 이 원칙을 기본으로 삼는다.

공장 가동률이 떨어지면 이익은 커녕 고정비 회수조차 어려워진다.

업계가 이 지경에 몰린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내수정체다.

지난해 내수성장이 처음으로 한자리 성장에 그친데 이어 올해는 10% 이상
줄어드는 마이너스 성장시대로 빠져들고 있다.

수출을 하면 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자동차산업은 어느 나라든지 최고의 보호산업이다.

밀어낸다고 수출되는 품목이 아니라는 얘기다.

수출비중이 50%를 넘는 나라는 그야말로 서너개 나라에 불과하다.

그나마 올해 수출증가율이 20%를 넘는게 다행이지만 이것도 정상적인
수출은 아니다.

현대가 5개월치의 해외 현지재고를 갖고 있고 나머지 업체들은 그 이상의
재고를 해외에 쌓아두고 있다.

여기서 공급과잉의 문제가 제기된다.

지난해 국내 완성차 7사의 국내 생산능력은 모두 3백50만대.

올해도 대우의 군산공장 본격 가동과 현대 아산공장의 가동으로 생산
능력은 4백16만5천대로 지난해보다 19%나 증가했다.

내년에도 마찬가지다.

기존 공장의 생산능력 증대가 예정돼 있는데다 삼성자동차도 연간 8만대의
승용차생산에 들어갈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판매는 수출 내수를 모두 합쳐봐야 3백만대를 넘기기가
어려워 보인다.

더욱이 큰 문제는 내년에도 상황은 별로 나아질 것이 없다는 것이다.

수요를 무시한 증설경쟁, 무분별한 신규업체들의 참여가 자동차업계를
속으로부터 멍들게 하고 있는 원인이다.

< 김정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