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은 영원하지 않다.

용기있는 자에겐 극복의 대상일 뿐이다.

우리 경제가 당면한 불황도 마찬가지다.

그 환부가 아무리 깊고 쓰라릴지라도 치유하고 이겨내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극복은 가능하다.

산업현장 곳곳에서는 요즘 불황극복을 위한 함성이 드높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노사의 응집된 힘이 ''구조적이어서 영원히
헤어날 수 없을 것 같던 불황''이란 껍질 하나하나를 벗겨가고 있다.

도전과 결의로 오늘의 시련을 이겨내고 있는 산업현장을 직접 찾아 시리즈로
소개한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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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20분, 울산 현대중공업 정문.

아침의 찬공기를 가르는 2만여 근로자들의 출근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8시 정각, 땅땅 쇠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전기실 계기판의 바늘이 한껏
돌아간다.

1백20만평 조선소의 전작업장이 완전가동되며 전기사용량이 최대로
올라섰음을 나타내는 사인이다.

예전보단 30분 빠르다.

과거에는 출근후에도 커피를 마신다, 작업장비를 나른다 해서 10~20분이
후딱 지나갔지만 이제는 다르다.

출근과 동시에 작업도구를 집어든다.

다음날 작업할 장비와 소재는 미리 준비해 놓고 퇴근하는게 상식이 됐기
때문이다.

"경쟁상대인 일본을 따라 잡으려면 1분의 낭비도 아깝다"는 절박한 인식이
이제 현중 근로자들의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

지난해 국내 조선소들은 사상 최악의 불황을 겪었다.

세계 조선경기가 침체된데다 거듭된 임금인상으로 가격경쟁력마저 일본에
뒤져 당장의 일감확보가 다급했다.

자연히 저가 출혈경쟁이 되풀이됐다.

불과 2~3년전 세계 제일의 조선대국을 꿈꾸며 앞다투어 설비증설에 나섰던
것과는 딴판이다.

올들어서도 후유증은 계속된다.

1.4분기 선박수주액은 당초 목표인 2억1천만달러의 66%에 머물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경쟁상대인 일본에 완전히 뒤처지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도
감돌았다.

"호황기였던 93년 VLCC(초대형 유조선)의 척당 가격이 1억달러는 됐지만
지금은 8천1백만달러선입니다. 수주에 성공해도 채산성이 문제되지요.
결국 생산성 향상밖에는 정답이 없다는 결론입니다"(2야드본부장 전익찬
상무)

이러한 각오아래 현중맨들은 "힘찬 21"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전사적인
불황돌파 운동에 돌입했다.

<>선박건조기간의 단축 <>사업부별 자동화시스템 구축 <>원가 및 인력절감
등이 골자였다.

"변화는 나부터,혁신은 다 함께"라는 플래카드처럼 나태해진 근로정신을
다시 세우자는 의식개혁운동도 뒤따랐다.

그 결과 초대형 유조선 1척을 짓는데 들어가는 맨아워(인시)를 80만시간으로
작년말보다 20%가량 줄일 수 있었다.

"일본의 45만~50만시간과 비교하면 아직도 높은 수준이지만 연말까지
75만시간, 내년까지 65만시간으로 줄이면 한번 겨뤄볼 만하다"는 전상무의
표정에선 결전의 의지가 엿보인다.

피땀어린 원가절감운동은 조선소의 풍경도 바꿔 놓았다.

울산조선소 2도크.

대형 유조선을 6척이나 만들고 있지만 불과 20~30명의 근로자들밖에
안보인다.

그래도 경영진에선 사람이 많다고 아우성이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한척을 짓고 다음배로 넘어가는
주먹구구식 관리로는 망하기 십상입니다. 1년이면 50여척, 1만개가량의
블록을 만들어야 하니 컴퓨터를 이용한 철저한 인력관리가 생명입니다"
(정동수 사업기획부 이사)

선박의 조립단위인 블록을 대형화하고 용접로봇을 도입하는 등 기술혁신
운동을 펼치다보니 이제는 건조기간도 대폭 줄어들었다.

요즘 어지간한 선박은 8개월이면 뚝딱 만들어진다.

불과 얼마전만 해도 10개월이 넘게 걸리던 작업이었다.

높아진 임금을 탓하고 있기보다는 생산성 향상으로 불황을 타개하겠다는
회사의 정책에 근로자들의 호응도 뜨겁다.

울산에선 최근 사무용품인 "플러스펜"이 화제다.

끝이 뭉뚝해진 플러스펜을 칼로 깎아쓰면 수명이 늘어나 연간 4백만원이
절약된다고 해서 이게 유행이 됐다.

회사의 어려움을 나몰라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조선소는 강성 노동운동의 대명사였지만 올해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임금협상이 임박했지만 현장에서 만난 한 근로자는 대뜸 "파업요? 그것만은
안됩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노사가 하나로 화합한 응집력은 당장 대형 수주전에서 일본을 제치는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도 노르웨이로부터 초대형 유조선 4척을 3억3천만달러에 수주하는
등 전반적으로 영업분위기가 활기를 띠어가고 있다.

주변여건도 좋아지고 있다.

일본조선소들이 한국을 견제하는 수단이 됐던 엔화 약세가 강세로 돌아서며
가격경쟁력이 회복되고 있는 것.

조금만 더 노력하면 황량한 모래벌판을 세계 최대의 조선소로 탈바꿈시켰던
기적을 또다시 재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 흐른다.

"격렬하게 시위하고 난 뒤라도 파업이 끝나면 밤을 새워 생산량을 달성해
내는게 울산조선소입니다. 올해초 과장급이상 중간간부들이 해병부대에서
위탁교육을 받으면서도 한명의 낙오자가 없었습니다. 회사가 어려울수록
똘똘 뭉치는게 우리 아닙니까"

생산지원1부 전봉규 과장이 힘주어 말하는 "현대정신"이다.

< 울산=이영훈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