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홍 기계공업진흥회장(기아그룹회장)은 "공업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을
가끔 한다.

"경제발전을 등산에 빗대어 본다면 우리경제는 헬리콥터를 타고 올라가다
산꼭대기 근처에서 갑자기 내려버린 형국이다.

정상의 경치를 충분히 즐겼는데 문제는 앞으로도 올라가야 할 길이
험난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등산기술을 익혀놓은 것도 아니다.

우리 경제가 지금부터라도 기초기술력의 배양에 진력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김회장은 청년시절 일본인들이 출간한 일본기계공업편람을
보며 "기계"를 배웠다고 한다.

"공업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은 당시 공부하던 편람만큼 충실한 교재가
아직도 국내에 드물다는 사실을 한탄하며 김회장이 아프게 털어놓은
반성문이다.

기계산업을 흔히 "산업의 꽃"이라고 부른다.

"공장을 만드는 공장"이라고도 한다.

기계산업이야말로 국가경제가 돌아가는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계산업의 기술수준은 곧 그나라 경쟁력의 척도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중후장대하다는 이미지처럼 과거 기계업계는 보수적인 경영으로 유명했다.

도전적으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하거나 경영혁신을 통한 발빠른
시장선점보다는 정부정책에 발맞춰 느릿하지만 안전한 경영정책을 선호했다.

여기엔 정부 주도의 성장일변도식 경제정책이라는 우리경제의 구조적인
문제가 한 몫을 거들었다.

당장의 사업화가 급하다보니 자체적으로 기술개발을 하기보다는 미국
일본 독일 등의 선진국에서 완성품이나 주요부품을 사다쓰는 경우가 많았다.

수출 역시 마찬가지.

고유의 브랜드로 독자적인 시장개척에 나서기보다는 선진업체의 하청을
받아 주문받은대로 물건만 납품해주는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의
영업에 길들여져 왔다.

잘못된 투자정책으로 업계가 휘청거리던 80년대초반에는 "산업합리화
정책"이 구세주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계업계 최고경영진들은 요즘 고민에 빠져 있다.

기술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시장이 개방되면서 외국 선진업체들의 공세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공작기계 중장비 철도차량 등 일부 품목은 이미 내수시장이 포화상태로
수출이 아니면 활로를 찾을 수 없게 됐다.

안으로는 취약한 기술력을 보강하고 밖으로는 해외신시장을 개척하느라
잠시 쉴 여유도 못갖는게 최근 기계업계 사장들의 생활이다.

기계업계 경영진에겐 "신기술에 대한 센스" "정부정책과 경기에 대한 전망"
"해외시장을 꿰뚫는 감각""관리능력" 등이 요구된다고 한다.

어느것 하나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것들이지만 요즘처럼 이들을 복합적으로
겸비한 "슈퍼맨"이 필요한 때도 드물다는게 업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우선 기술력 하나만을 놓고 볼때도 국내 기계산업의 경쟁력이 지극히
취약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이나 일본 독일 등 선진국과 비교하면 10년 이상 뒤떨어졌다는게
지난해 산업은행이 조사한 결과다.

이는 기계산업이 무역적자가 심한 대표적인 업종이라는데서도 나타난다.

지난해 기계류의 무역적자는 89억달러로 전체 무역적자인 2백6억달러의
무려 40%를 넘어섰다.

선진국의 기술이전 회피가 갈수록 심해지는 지금 기계업계 경영진들의
1차적인 관심은 독자적인 기술개발에 쏠려있다.

지난 3월 현대중공업 울산사업장에서 있었던 터빈발전기 1호기 출하식.

행사장에 참석한 김정국 현대중공업 사장의 관심은 온통 "국산화율"에
쏠려 있었다.

터빈발전기 생산과정을 브리핑받으며 부품 하나하나마다 국산제품인지를
물어보고 외국제품이라면 반드시 국산화할 것을 당부했다.

경제상황과 정부정책동향을 잘 살피는 것도 최고경영진들이 할 일이다.

기계사업에는 대부분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만큼 신규설비투자에는 정확한
판단력이 요구된다.

경기가 나빠지고 있는데도 무작정 투자를 했다간 과잉투자가 돼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머뭇거리다간 소중한 사업확장기회를 놓쳐버릴 위험이 크다.

신도시 건설붐을 예측하지 못했다가 공급물량이 부족해 애를 먹은후
불황이 닥친 지난해에는 수요부족으로 설비를 놀려야 했던 중장비가 대표적인
예다.

해외감각은 어느때보다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자질이다.

내수시장이 한계에 도달한 지금 해외시장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개척해내느냐가 중공업체 생존의 관건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대우 삼성 한라 등이 잇달아 해외생산공장을 세우는 것도 더이상
"우물안 개구리"로는 살아남기 힘들다고 판단해서다.

발전설비시장을 독점하던 한국중공업 역시 일원화조치 해제와 시장개방을
맞아 해외사업쪽의 비중을 대폭 늘리고 있다.

이러한 노력결과 전체 매출에서 20% 가량을 차지하던 해외사업 비중이
최근엔 절반가량으로 부쩍 늘어났다.

기계산업은 지금 대전환의 길목에 서있다.

철도차량 조선 등 후진국형 사업에서 철수하고 에너지 환경 발전설비 등
고부가가치형 사업 위주로 틀과 모양을 다시 짜는 것은 물론 해외시장
개척에도 나서야 한다.

기계업계 최고경영진들은 그동안의 "보수적 경영"에서 탈피해 그
어느때보다도 공격적인 경영을 해야 할 변신의 시기를 맞은 셈이다.

< 이영훈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