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수하동에 있는 동국제강 본사는 요즘 흙먼지 날리는
공사장으로 변했다.

지난 74년 청계초등학교를 인수해 24년째 쓰고 있는 본사사옥을
개보수하고 있는 것.

웬만하면 새 건물을 올릴 법도 하지만 동국제강은 3층짜리 초등학교
건물을 몇년이라도 더 쓰려고 고집스레 손질중이다.

자린고비경영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반면 이 회사는 포항에 연산 3백만t 규모의 철강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무려 1조원을 투자하고 있다.

물론 설비는 세계 최신식이다.

그래서 동국제강 사람들은 사옥은 빈약하지만 공장 하나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는 걸 자랑중에서도 자랑으로 여긴다.

"비생산 부문은 검소하게, 그러나 설비투자는 최신으로 과감하게-"

동국제강의 사례는 이같은 철강업체의 속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체면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경영철학이라고 할까.

어쨌든 이를 몸으로 실천에 옮기고 있는 이들이 바로 철강업체 사장들이다.

철강업체 사장들이 "투자땐 큰손, 원가절감엔 짠물"로 통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사실 철강업체 사장들의 이런 특징은 업종 특성에서 기인한 바 크다.

철강업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대표적인 장치산업.

장치산업 중에서도 특히 설비의 경쟁력이 그 기업의 경쟁력을 결정짓는
업종이다.

설비 하나가 수천억원에서 수조원에 달하는 고가인데다 어떤 설비를
어떤 시기에 도입하느냐가 기업의 사활을 좌우한다.

꼭 들어맞는 예는 아니지만 한보철강이 코렉스(용융환원제철)라는 최신
설비에 무리하게 투자했다가 낭패를 본 것만으로도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다 보니 "첫째가 설비투자,사람은 둘째"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때문에 철강업체 사장에게 요구되는 최우선 덕목도 역시 설비를 보는
혜안이다.

국내 철강업체 사장들이 대부분 공대출신의 엔지니어란 점도 이와
무관치 않다.

사장이 기술 전문가가 아니고선 회사 경영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철강업체 사장들이 너나 할것없이 세계 철강업계의 기술조류가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고 어떤 설비가 경쟁력이 있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단 투자할 설비를 고르고 타이밍을 결정하면 뭉칫 돈을 쏟아부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기본으로 따라붙는 것.

그래서 철강업체 사장들은 화려하게 보일 수도 있다.

수조원 규모의 투자를 결정하고 추진하는 통큰 경영인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철강업체 사장들의 속내를 뜯어보면 사정은 다르다.

그런 자린고비가 없다.

다른 산업에 비해 투자규모는 크지만 부가가치나 수익률이 높지 않은
철강업종의 특성 탓일게다.

철근이나 형강 등을 만드는 전기로 업체들의 제품 생산원가중 재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60~70%에 달하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철강업체 사장들은 웬만큼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는 이익을
낼수 없다.

철강업체 사장들이 경비절감에 관한한 쥐어짜기로 소문난 것도
이때문이다.

최근 불황여파로 많은 기업들이 10% 원가절감 운동 등을 벌이고 있지만
철강업계에선 이미 해오던 버릇들이다.

이들은 이미 내실경영을 넘어 탄탄경영을 모토로 삼고 있을 정도다.

그렇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데가 철강업계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철강업체 사장들에겐 소탈함과 검소함이 몸에
배어 있다.

말쑥한 정장보다는 작업복 점퍼를 즐겨 입고 반짝거리는 구두보다는
투박한 작업화를 편해하는 사장이 많다.

특히 현장에선 사장과 근로자가 따로없다.

조업과정을 일일이 챙기며 훈수도 두고 때론 즉석에서 토론도 벌인다.

대부분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엔지니어 출신이라 그게 가능하다.

퇴근때는 누구와도 어울려 소주잔을 기울 일 수 있는 사람들이 또한
철강업계 사장들이다.

그러다 보니 술실력도 보통이상이다.

기본이 막소주 두병이고 폭탄주도 마다 않는다.

결국 기술이나 설비에 관한한 21세기형 전문경영인이지만 내부살림은
전통을 고수하는 60년대식 한국형 경영인들.

바로 그들이 지금 한국의 철강업계를 이끌고 있는 사장들이라고 할수
있을 것같다.

< 차병석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