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종합화학은 조만간 구조조정의 방향과 세부절차를 담은 "21세기
비전"을 발표할 예정이다.

세계적인 컨설팅업체인 미국의 매킨지사에 의뢰해 2년여간 준비해온
것이다.

골자는 이렇다.

우선 현재 경쟁우위를 보이고 있는 품목은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간다.

PVC PE(폴리에틸렌) 가성소다 등 "캐시카우(cash cow)" 노릇을 하는
품목에서 부지런히 돈을 벌어 신규사업을 위한 투자재원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두번째는 수익성 높은 신규사업 진출을 통한 사업 다각화다.

화합물반도체 2차전지 반도체화학품 등이 한화가 선택한 신규사업들이다.

끝으로 현재 더 이상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되는 품목이나 사업은
과감히 정리한다.

매킨지가 제시한 한화의 "21세기 비전"은 언뜻보기엔 "공자님 말씀"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방향을 알면서도 대부분의 업체들이 구조조정 작업에 제대로
손을 못대고 있는 것이 우리 화학업계의 현실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수년간 손해를 보더라도 최대의 공급능력을 갖는게
급선무라며 범용제품의 신증설에만 심혈을 기울여온 결과다.

그래서 NCC(나프타분해공장) 8개사 모두 남부럽지 않은 규모를 갖추었지만
제대로 돈을 버는 알짜배기 업체는 거의 없는 상태가 돼버렸다.

지난해의 경우 법정관리 중이어서 신규투자가 거의 없는 대한유화가
3백30억원의 흑자를 내 경영실적이 가장 좋게 나타나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일부에서 화학산업 특히 거대장치산업인 유화는 산업화 초기 단계에나
적합한 것으로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그런가.

결론부터 말하면 전략만 잘세워 발빠르게 구조를 바꿔가면 가장
발전가능성이 무한한게 게 화학산업이다.

미국의 세계적인 연구기관인 SRI의 전망이 그렇다.

SRI는 21세기 유망산업으로 우주항공 정보통신과 함께 신소재 생명공학
환경산업 등을 꼽고 있다.

신소재 생명공학 환경산업은 모두 화학산업의 기반 위에서 발전하는 것.

플라스틱메모리 플라스틱광섬유 광학스위치 고기능성 액정 등 정보통신을
위한 신소재는 모두 화학산업에서 만들어진다.

암 에이즈 치매와 같은 질병의 치료 약품 개발도 화학의 몫이다.

인공신장 등 각종 장기를 대체할 슈퍼엔지니어링플라스틱은 화학이 없으면
개발이 불가능하다.

환경분야도 마찬가지다.

화학산업이 폐기물 자동 용해제나 폐수정화용 약제를 개발해내야
발전할 수 있다.

이미 선진국들은 화학산업의 발전가능성을 이렇게 높이 평가해 앞서나가고
있고 그만큼 우리에게도 기회가 많은 편이다.

국내 화학업계도 지향해야 하는 방향은 잘 알고 있다.

동남아등 후발국들이 추격해오고 있는 범용제품의 비중을 줄이고 의약
농약 안료 염료 등 정밀화학 제품 생산구조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

원인은 뭔가.

우선 투자재원이 적어서다.

정밀화학은 막대한 연구개발비가 투입돼야 한다.

미국 듀폰사의 경우 연 매출의 3%인 11억달러 정도를 매년 연구개발비로
쓰고 있다.

국내 NCC업체들의 연구개발비는 연 1억달러가 채 못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절대액수에서 상대가 되지 않으니 쫓아가기는 커녕 매년 격차가
더 벌어진다.

거기다 일반화학이나 석유화학과 달리 고부가가치 정밀화학 일수록
기술축적이 어려워 1백% 상품화가 보장이 되지 않는다.

경영자의 결단이 없으면 투자자체가 불가능하다.

LG화학이 최근 국내에서 처음으로 신물질 상품화에 성공한 제초제
"피안커"의 경우 4만8백63회의 실험끝에 상품화에 성공했다고 해서
물질번호를 "LGC-40863"으로 붙였을 정도다.

업계 전문가들은 구조조정의 이같은 난제를 풀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국내외 업체간 전략적 제휴를 들고 있다.

백화점식 생산을 지양하고 각 업체마다 전략품목을 집중 육성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자신없는 품목은 그 품목을 더 잘하는 회사에 밀어주어 각사마다
아시아 1위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분야를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기반 위에서 정밀화학 분야의 세계적 업체들과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단기간에 구조조정을 시도하는 것이 현재로선 유일한 대안이라는
설명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성사된 미국의 듀폰과 영국의 ICI사의 전략적 제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듀폰은 ICI에 폴리에스터부문을 넘기고 ICI는 나이론을 듀폰에 넘겨
양사는 각각 나일론과 폴리에스터 부문에서 각각 세계 1위 업체가 됐다.

일본도 최근 수년간 활발한 합병을 통해 유화부문의 경쟁력을 높여가고
있다.

오직 국내 업체들만이 각사마다 모든 품목을 갖고 출혈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21세기에 한국은 화학후진국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얘기다.

<권영설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