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계 최고경영진들은 두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작업복 차림으로 근로자들과 스스럼없이 소줏잔을 기울이는 소탈한 모습이
국내에서의 얼굴이라면 때로는 해외에서 세련된 매너와 화술로 대형
선주들과 친분을 쌓아두어야 한다.

조선업계 사장들은 유난히 "현장경영"을 중시한다.

1년이면 절반은 조선소의 야드(선박을 짓는 작업장)에서 보낸다.

조선소라는게 워낙 대규모사업장인데다 근로인력도 1만명이 넘는게
보통이니 이들을 통솔하는게 만만치가 않아서다.

이해규 삼성중공업사장은 일주일이면 3일은 거제조선소에 내려가
생산현황을 점검한다.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불쑥 작업현장에 찾아가 근로자들의 불편과
애로점을 듣는다.

신영균 대우중공업사장은 옥포조선소 인근의 회사아파트에서 직접 저녁을
지어먹으며 근로자들과 대화를 나누는게 취미가 돼버렸다.

김정국 현대중공업사장, 최길선 한라중공업사장, 송영수 한진중공업사장
등의 집무실은 아예 조선소내에 마련돼 있다.

현대의 김사장은 취임하자마자 "지원부서는 생산부서를 위해 존재한다"며
울산조선소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며 근로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처럼 조선업계 사장들이 현장경영을 중시하는 이유는 노무관리가 곧
생산성 향상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조선업은 인건비가 선박건조원가의 30%를 차지하고 있어 노사분규라도
한번 터지면 1년 장사가 말짱 도루묵이 돼버린다.

강성 노동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한 조선소를 경영하다보니 사장들은
노사문제에 관한한 전문가 뺨치는 노하우를 갖고 있다.

이들이 조금씩 소개하는 비결의 핵심은 끊임없는 관심과 대화다.

평소부터 근로자들과 신뢰를 쌓아놓아야지 임금협상 때나 얼굴을 내비치는
안이한 태도는 안된다는 것이다.

대우의 신사장은 지난 95년 관리본부장으로 재임할 때 만성적인
노사분규로 이어지던 조선소의 임금협상을 무난히 타결지으며 전무에서
사장으로 2계급 특진했다.

노동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경영진의 입장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설득해나가는 그의 협상법이 주효했다는게 관계자들의 회고다.

대우중공업은 이후 노사분규가 없는 모범사업장으로 탈바꿈했다.

김정국 현대중공업사장 역시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노무관리엔
자신있다"고 장담할 정도로 노사관계엔 모범적이다.

노조에서도 높은 그의 인기에는 시간날 때마다 야드를 돌며 근로자들을
챙기는 현장경영이 한몫을 했다.

조선업계 경영인들의 이러한 노력은 지난해 노동법 개정의 와중에서도
조선소가 비교적 안정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이다.

험악한 이미지의 노무관리와는 달리 조선소사장들에게는 세련된
국제감각도 요구된다.

조선업의 호.불황은 해운경기에 크게 영향받으므로 유가나 곡물 광물 등
화물의 수급추이, 환율변동 등에도 풍부한 상식이 요구된다.

작업물량의 90%가량을 해외선사에서 수주해오다보니 출장도 잦은
편이다.

보통 1달에 한 번 꼴로는 해외선사를 방문한다.

대형 수주전이 아니더라도 굵직굵직한 선주들의 행사가 있으면 꼭 참석해
얼굴도장을 찍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업계 경영진들은 최근 고민에 빠져 있다.

현대 대우 삼성 등 이른바 국내 3대 조선소가 곧 세계 3대 조선소가
될 정도로 덩치는 커졌지만 이제는 가격경쟁력마저 일본에 추월당해
속병이 깊어지고 있어서다.

90년대들어 일본 조선소들이 생산성 향상에 박차를 가한데다 엔저라는
호재를 맞은 반면 국내업계는 과다한 임금상승과 설비투자에 따른
후유증으로 저가수주를 거듭하는 악순환을 밟고 있다.

한편으론 기술개발에, 다른 한편으론 생산성 향상에 박차를 가하며
실추된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업계의 한 사장은 "조선업은 근본적으로 노동집약적 산업이란 특성을
갖고 있어 저임금 국가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며 "기존 사업부문의
부가가치를 높이면서도 중공업 전체매출에서 차지하는 조선비중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낮춰가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때 허허 모래벌판을 세계 최대의 조선소로 일궈낸 이들은 이제
고부가가치 창출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는 셈이다.

< 이영훈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