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가 한창 호황을 달리면서 너나없이 들떠있던 95년 어느 대그룹 비서실
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룹회장들끼리 서로 돌아가면서 골프모임에 초청하고는 초청한 측에서
가벼운 선물을 주곤했다.

이 그룹의 회장이 초청할 차례가 되자 계열사에서 생산하는 비누를 선물로
준비하라는 명령이 비서실에 떨어졌다.

선물준비를 맡은 신참 비서는 아무리 가벼운 선물이라고는 해도 대그룹
회장들에게 하찮은 비누를 선물한다는게 의아했지만 명령인만큼 나름대로
정성스레 준비를 했다.

최근에 시판된 고급비누를 몇세트 준비해갖고 회장실에 들어갔던 비서는
얼굴이 벌개져서 나왔다.

회장으로부터 "뭣하러 쓸데없이 비싼 비누를 준비했느냐. 2천원짜리
한세트씩 하면 되지" 하는 호된 꾸지람을 듣고 나온 비서는 한참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은 신용카드대금 갚는데 급급하면서도 남들한테 체면 깎이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억만장자는 한푼도 헛되이 쓰지 않으려고 하는 거꾸로
된 이치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모르겠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잘살건 못살건 태어나서부터 과소비 혹은 외제와 인연을 맺는다.

국민학교나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들에게는 코코스나 프라이데이같은
외식점을 빌려 생일잔치를 해주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다.

전세집에 사는 주부도 "아이 기죽이지 않으려고" 무리를 마다않는다.

호텔 뷔페식당을 빌려서 하는 4백만~5백만원짜리 돌잔치가 서울에 있는
특급호텔에서만 한달에 20여건이 치러지고 있으며 중고교 학생은 닉스
리바이스 캐빈클라인 같은 10만원이 넘는 청바지를 입어야만 된다고 생각
한다.

해외에 파견된 상사원이나 공무원들은 고급쇼핑코스 명문골프장을 꿰뚫고
있지 않으면 국내에서 여행하러오는 상급자들로부터 무능하다고 찍힌다.

크리스티앙디오르 샤넬 지방시등 프랑스의 유명사치품 제조회사들의
연합회인 콜베르위원회가 지난해 조사한데 따르면 자국내 판매는 1.4%
줄어든 반면 한국으로의 수출은 70%나 늘어났다.

프랑스사치품회사들을 우리가 먹여 살린 꼴이다.

우리의 과소비는 아이나 어른, 부유층 서민층, 회사 국가 가릴것없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지난해 아들결혼식에 경비행기를 동원해 축하비행까지 벌이는등 호화판
결혼식으로 물의를 빚은 국회의원은 항운노조출신이었다.

회사원은 집보다 승용차를 먼저 사고 평범한 주부도 주말은 교외에서
즐기는걸 당연시한다.

대기업과 금융기관들도 앞뒤없는 경영으로 직원들의 과소비를 부추겼다.

지난해 중국에서는 국내 모그룹에서 현지화연수를 나온 상사원이 외국인
모임때마다 자기가 한턱내겠다며 나서는 바람에 일본인과 서양인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된 일도 있었다.

국내에서는 부채비율이 꽤나 높은 축에 속하는 그룹계열사의 직원이었다.

기업들이 하룻밤에 수백만원이 드는 호화룸살롱접대에도 거리낌이 없는
것은 제도상 허점 때문이다.

접대받는 측은 물론이고 회사입장에서도 접대비를 손비로 인정받으니
피차 아까울게 없다.

자기가 노력해 쌓은 부가 아니기에 과소비가 전혀 부끄럽지 않다.

정부도 국민들의 과소비를 조장하는데 일조했다.

반도체등의 호황으로 외화유입이 급증할때 국민소득 1만달러시대니 선진국
진입이니 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해외에서 쓸수 있는 신용카드한도와 외화소지한도를 뒤늦게 늘렸다가
경상수지적자가 확대되자 부랴부랴 과다한 해외여행경비사용자에 대해
조사에 나섰다.

내돈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할수도 있지만 이게 바로 천민자본주의
다.

졸부근성을 자랑하고 다니는 꼴이다.

1만달러소득을 5천달러쯤으로 여겨도 시원찮을 판국에 3만달러로 즐기는
"착각"이 우리경제를 속부터 곯게 만들고 있다.

< 김성택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