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거울은 최근 전북 익산에 대규모의 거울공장을 완공했다.

이 거울공장은 대지 8천평에 건평 2천4백평 규모.

이달부터 연산 2백만평방m의 고급거울을 본격 생산한다.

이 공장은 거울공장으로서는 드물게 공정을 완전 자동화했다.

자동화라인의 길이는 2백64m.

아시아지역에서는 최대규모다.

세계에서도 다섯손가락안에 들어간다.

이 공장은 단순히 규모만 큰 게 아니다.

커튼코팅등 첨단공정을 채택,미세한 흠조차 전혀 없는 고급 거울을
생산한다.

수주를 받고 8시간안에 8천78평방m의 거울을 생산할 수 있어 해외주문에도
즉시 응할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는 거울을 포장할 때 유리와 유리사이에 종이를 깔았다.

그러나 이회사는 특수파우더를 활용, 거울을 운송할 때 흠집이 나지
않도록 했다.

이것도 한국거울만의 독특한 기술이다.

이 회사는 하루 50t을 생산할 수 있는 순수장치도 설치했다.

미국 EDC사로 부터 동리커버리장치를 도입, 하루 2백t의 오폐수를 정수할
수 있는 별도처리장을 세웠다.

이제 거울공장으로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앞선 시스템을 갖춘 셈.

일본거울에 밀리던 한국거울이 어떻게 이런 성공을 거뒀을까.

이의 이면엔 김중권사장(68)의 피와 땀이 숨겨져있다.

김사장은 국내에서 무려 51년간을 거울공장에서 일해온 인물.

이 첨단자동화공장은 그의 오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다.

김사장이 처음 거울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지난 46년초.

18세의 나이로 서울 인사동에 있는 삼양제경소에서 유리를 놓고 은을
도장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 공장은 그의 매형이 운영하던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밤잠자지 않고 일했다.

6.25가 터지자 부산으로 공장을 옮겨 계속 거울만드는 일을 계속했다.

그가 유리공장사장이 된 것은 지난 55년초.

부산에서 삼화유리를 창업했다.

천성이 부지런한 김사장은 이때부터 고급거울을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는데
온힘을 쏟았다.

그러나 당시 판유리란 일본의 아사히유리나 니혼초자에서 수입해오는
것이어서 소재가 충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은도장기술을 끊임없이 향상시켜나갔다.

덕분에 꽤 많은 돈을 모은 김사장은 다시 서울로 공장을 옮겨 확장했다.

종로3가 세운상가에 진화제경이란 간판을 내걸고 하루 5백평규모의
유리를 생산했다.

당시로서는 이정도 규모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서자 거울의 수요가 급증했다.

대규모 거울공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됐다.

더욱이 서울시내에 호텔을 세우면서 건설업자들이 "국산유리는 못쓴다"라며
일본유리를 수입해 쓰는 일이 연거푸 일어났다.

김사장은 이때 대규모의 고급거울공장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당시엔 그럴만한 돈이 부족했다.

그는 전국에 흩어져있는 15개 거울업체를 일일이 찾아가 설득했다.

"우리가 돈을 모아 대규모 거울 공장을 짓자"

이렇게 설득한 그는 판유리가공조합을 결성하고 전북에 국내 첫 협업화
공장을 지었다.

80년초 김사장이 공장을 완공시키는 과정에는 정말 고생이 많았다.

자금조달에서부터 차질을 빚었으나 중소기업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공장을 지었다.

이 공장이 완공되면서 겨우 일본거울이 밀려들어오는 걸 막게 됐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오자 다시 대만 태국 인도네시아에 설립한
일본현지법인들이 대공세를 개시했다.

드디어 그는 평생동안 각오해온 사업에 착수했다.

세계 최첨단의 유리공장을 만들어 오히려 일본으로 역공세를 펴자는
것이었다.

그의 각오는 이번 익산자동화공장을 지으면서 현실화됐다.

한국거울은 올상반기부터 일본시장공세에 나선다.

50년이상 거울과 함께 산 그의 피땀이 열매를 맺고있다.

< 이치구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