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그동안의 복수노조 반대입장에서 한걸음 물러난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경제난국을 풀어갈 수 없다는 현실론을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17일 경제5단체 대표들이 성명서를 채택하면서 지난 연말 이후 파업손실액이
작년 연간파업손실액의 2.6배에 달하는 3조원에 육박했다는 것을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또 노동계가 당초 18일로 예정했던 4단계 총파업을 24일로 연기하는
"유연한" 입장을 취하고 나온 마당에 무리한 강수를 두지 않겠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노사관계 전문가들은 이런 재계의 태도 변화가 복수노조에 대한
우려의 기본인식이 바뀌었다는 뜻은 아닌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노조의 허용 주장이 워낙 강경한 만큼 양보는 하되 몇가지 전제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조건부 후퇴라는 분석이다.

경제5단체장이 이날 채택한 성명서에서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 무노무임
원칙 등을 관철시켜야 한다고 밝힌데 더해 당초 2001년부터 실시키로 돼있는
전임자 임금지급금지 조항을 반드시 법제화해야 한다고 강조한 점이 이런
해석의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상급단체의 복수노조가 합법화될 경우 현재의 관행상
상급노조 간부의 월급여는 소속회사에서 나가게 돼있다"며 "생산에 참여하고
있는 종업원들의 급여도 동결해야 하는 마당에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노사간 균형을 위해 전임자임금 지급금지의 실시시기를 같이 앞당겨야
균형이 맞는다는 설명이다.

재계가 경제5단체장 회의에 이어 열린 경제단체협의회에서 19일부터 국회
환경노동위 주관으로 시작될 노동법 관련 공청회에 경총 등의 실무진을
투입시켜 재계의 입장을 관철시키기로 의견을 모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총은 노동계와 야당이 복수노조와 전임자임금 문제외에 정리해고
변형근로 대체근로 교원단결권 등에 대해 새로운 안을 제시할 것으로 보고
부문별로 재계의 단일안을 정리, 여야를 설득하는 작업을 벌여갈 예정이다.

재계는 그러나 현재로서는 수세적일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새로 개정될
노동법에 대해 우려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국회의 속성상 중장기적인 미래를 내다보는 경제논리 보다는 불협화음을
최소화하는 정치논리를 택할 가능성이 높아서다.

경제5단체장이 임시국회 개원일을 택해 만난 것은 결국 이런 재계의
위기감을 함께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 권영설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