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왜관에 있는 한성특수유리칠곡공장에 들어서면 무엇보다 공장크기에
먼저 놀라게 된다.

일반 복층유리공장들보다 5배이상 커서다.

이 공장은 대지 6천2백평에 건평이 4천5백40평에 이른다.

공장규모만 큰 것이 아니다.

특수유리공장으로선 보기드물게 완전자동화 시스템을 갖췄다.

깨끗한 공장 안엔 대형호이스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갓 생산한 복층유리
제품을 계속 실어낸다.

박선은 한성특수유리사장(44)은 지난해말 이 공장 완공을 계기로 복층유리
안에 자동블라인드가 내장된 창호를 신제품으로 내놨다.

이 제품은 완벽한 단열 및 방음능력을 갖춘 것으로 복층유리속에 리모컨
으로 자동조종이 가능한 블라인드가 들어있다.

이 창호가 개발돼 나오자 대형건설업체들이 앞다퉈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한성특수유리는 이제 최고기술업체로 올라 섰다.

그러나 한성특수유리의 이같은 성공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건 결코 아니다.

박사장이 유리사업을 시작해 14년간 흘린 피와 땀을 생각하면 이는 작은
성과에 불과하다.

박사장은 80년대초 무려 3년간 실업자생활을 한 뼈아픈 경험이 있다.

대구 태평로에서 조그만 건재상을 하다 연쇄도산으로 문을 닫은 뒤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부친의 요청으로 결혼을 했으나 3년간 돈한푼 벌지 못하고 빈털터리로
지냈다.

처음엔 친구의 상점을 찾아가 장기를 두며 소일했으나 2년이 지나면서부터
친구들조차 만나주기를 꺼려했다.

더이상 견딜 수 없어 전세방에 드러누워 죽고싶다는 생각만했다.

83년 10월의 일이다.

실업자로 방구석에 누워있는데 박사장을 찾아온 그의 누나가 5백만원을
빌려줄테니 무엇이든 해보라고 권했다.

그는 누나의 얘기에 "온몸에 전기가 통하듯 벌떡 일어났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박사장은 누나로부터 돈을 받아들자마자 앞만보고 뛰었다.

그동안 눈여겨 봐오던 유리공사사업을 시작했다.

대구 남산동에 10평짜리 가게를 얻어 한성유리상사란 간판을 내걸면서
그는 더 이상 실업자가 아니었다.

그간의 실업자생활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완전히 일속에 묻혀버렸다.

그의 생각은 오직 한가지 뿐이었다.

"다시 실업자가 될 순 없다" 이를 악물고 일했다.

이후 그는 아파트공사현장에서 밤새 일을 하다 아침해가 떠오르는 것을
수없이 봐왔다고 밝힌다.

그의 유리공사사업이 한단계 올라서게 된 것은 대구의 우방주택으로부터
공사를 얻으면서.

우방의 이순목회장은 그가 대구상고를 다닐 때 부기를 가르친 은사였다.

덕분에 그는 맨손으로 첫공사를 따낼 기회를 얻었다.

87년 여름 아파트공사장에서 작업복을 입은채 땀을 주룩주룩 흘리며 일을
하고 있는데 이순목회장이 그곳을 지나다 그를 보게 됐다.

이어 박사장이 이렇게 땀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몇번이나 이회장의
눈에 띄게 됐다.

이후부터 이회장은 "박사장은 틀림없는 사람"이라며 대형공사를 맡기기
시작했다.

또 청구주택 및 남선종합건설 등으로부터도 유리공사를 떠맡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89년 칠곡에 대지 7백평에 건평 4백평의 복층유리공장을
지었다.

코오롱건설 롯데건설 대림산업 등에도 납품을 하게 됐다.

대부분의 기업인들이 자신의 성공비결을 물으면 독특한 경영전략을
내세운다.

그러나 박사장은 이런 질문에 "기업인은 몸받쳐 죽도록 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잘라 말한다.

이번에 개발한 자동블라인드복층유리도 아침해가 다시 뜨는 모습을 수없이
쳐다본 뒤에야 개발해낸 기술이라고 덧붙인다.

부지런함으로 쌓아올린 한성이 이제 첨단기술기업으로 탈바꿈해가기
시작한 셈이다.

< 이치구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