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에 "그룹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제일제당 신세계 등 매출이 1조원을 넘는 대기업뿐만 아니라 외형이
1천억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중견기업까지 자잘한 자회사를 묶어 스스로
그룹임을 공표하고 있는 것.

올들어서만도 국제전선(희성그룹) 동원산업(동원그룹) 삼미기업(EnK그룹)
한국유리(한글라스그룹) 등 12개 기업이 이미 그룹선언을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삼성에서 분리된 새한미디어도 제일합섬을 계열사로 편입해 9월중 그룹을
공식 선언할 예정이며 금강제화도 조만간 그룹경영체제를 구축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불과 3~4년전만해도 언론 등에서 그룹으로 부르면 "우리는 그룹이 아니다"
라고 애써 고개를 젓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90년대 초까지만해도 기업들은 "그룹"이라는 말에 거부감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

부정적 이미지가 담겨져 있는 "재벌"의 또다른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나산그룹의 안병균회장은 작년초까지만 해도 임직원들에게 그룹
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기업 스스로 그룹화을 선언할 정도로 바뀐 것이다.

그룹선언의 유형도 다양하다.

한솔 신세계 제일제당 희성그룹등과 같이 모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파생
그룹이 있는가 하면 인수한 기업들을 모아 그룹을 선언한 곳도 있다.

더러는 그룹의 기존 기업을 쪼개 여러개의 계열사를 만든 뒤 그룹선언을
한 곳도 있다.

파생그룹이야 이미 오래전에 그룹체제를 갖춰 그룹선언이 크게 색다를게
없으나 중견기업들의 잇단 그룹선언은 분명 새로운 변화다.

기업들이 과거와 달리 앞다퉈 그룹경영체제를 표방하고 나서는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시너지 효과의 극대화와 대외 신용도및 기업이미지 제고를 꼽을 수
있다.

"그룹체제를 갖춤으로써 그룹운영위원회를 통한 계열사간 업무영역 조정
등이 가능해져 중복투자를 막을 수 있게 됐을 뿐만 아니라 업무협조체제도
공고해졌다"(한글라스그룹 이세훈총괄사장)

"명함에 그룹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뒤 은행 대출이나 관공서 업무처리가
훨씬 쉬워졌다. 계열사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중소.중견기업이지만 그룹
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놓으니까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 같다"
(A사 P이사)

이런 것들을 겨냥해 그룹선언을 했다는 설명이다.

그룹선언은 부수적으로 종업원들의 일체감을 높혀 주는 효과도 있다.

산내들그룹 관계자는 "그룹이라는 틀이 생겨 계열사 직원들도 이제 한가족
으로 느껴지며 종업원들도 "우리도 그룹"이라는데서 상당한 자긍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두번째로는 CI(기업이미지 통합)를 들 수있다.

특히 신규사업진출을 계기로 그룹화를 선언하는 그룹들이나 인수기업이
많은 그룹의 경우엔 CI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분석이다.

정보통신사업 진출에 맞추어 EnK그룹으로 출범한 삼미기업이 여기에 해당
된다.

EnK그룹의 계열사는 삼미기업 성진산업 광일전자등으로 회사명이 제각각
이었다.

제화업체에서 토털패션그룹으로의 변신을 계획하고 있는 금강제화도
마찬가지다.

세번째로 경영혁신을 위해 그룹선언을 한다는 지적도 있다.

경영환경이 워낙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어 모든 일을 "오너"가 관장하는
보수적 경영으론 한계에 부딪질 수 밖에 없다고 판단, 경영을 시스템화하기
위해 그룹선언을 한다는 것.

모그룹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경영체제를 구축키 위해 그룹선언을
한 파생그룹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는 설명이다.

극히 일부이긴 하나 통합의 효과를 겨냥해 그룹선언을 하는 기업도 있다.

신기그룹이 그랬다.

"신기그룹"은 계열사가 따로 없다.

그 자체가 회사이름이다.

동아무역 동아이데아 동아컴퓨터 등 3개회사를 "신기그룹"이라는 회사로
통합한 것.

나제훈 신기그룹사장은 "알스톰그룹처럼 여러회사를 한데묶어 각 사업부문
으로 통합하는 것이 여신한도를 늘릴 수 있을뿐 아니라 집중적인 성장을
꾀할 수있다고 판단돼 3사를 통합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그룹선언이 안정적 성장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룹화를 공표했지만 "오너"들의 경영마인드나 계열사간 업무협조체제등
내용상으로는 전과 달라진게 없는 그룹도 적지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국내기업중엔 모기업이 커져 중소기업에 주어지는
혜택이 중단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업을 중소기업규모로 잘게 쪼개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룹선언의 목적이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그룹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기업들의 이미지 개선노력으로 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좋아진데다 중견기업들의 잇단 그룹선언으로 "그룹=재벌"이라는
등식 깨지고 있어 기업들의 그룹선언에 가속이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 장진모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