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시장 개방 파고를 타고 외국 소형가전제품(전기면도기 헤어드라이어
등)업체들이 무차별적으로 한국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연간 8천억~1조원 규모로 추정되는 소형가전 제품시장의 70%를 이미 외국
업계가 휩쓸고 있다는게 업계 추정이다.

전기면도기의 경우 필립스(네덜란드)가 한국 시장에 본격 진출, 지난해
20만개를 팔아 국내 시장의 40%를 차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브라운(독일) 마쓰시타(일본) 등도 지난해 각각 15%와 7%의 점유율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필립스 관계자는 "올해 한국내 판매 목표를 작년보다 50% 많은 30만개로
잡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외국 업계의 한국내 판매 확대는 곧바로 국내 전문업체들의 입지
축소로 이어지고 있다.

작년의 경우 국내 업계가 차지한 시장점유율은 다 합쳐봐야 27%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나마도 고가품은 엄두도 못내고 중저가제품을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연간 1백50만대를 형성하고 있는 전기다리미 시장에서도 필립스 마쓰시타
등 외국산이 전체의 60%가 넘는 1백20만대를 장악하고 있다.

특히 세계적인 다국적 전자메이커인 필립스가 지난해 한국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 반입한 전기다리미는 자그마치 1천3백만달러(약 1백억원)어치.

가전시장이 본격 개방되기 이전인 94년까지만 해도 연간 1백만달러 수준에
불과했던 필립스의 대한공세가 본격화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시장에서도 국내 업계의 점유율은 40% 이하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코발트 국제전열 삼신전기 등 10여개 국내 전문업체들의 연간 판매량이
80만대에도 못미치고 있다는 것.

지금같은 추세가 계속될 경우 외국 업체들이 앞으로 2~3년 내에 국내
전기다리미 시장의 80~90% 이상을 휩쓸게 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필립스 등 외국 업체들은 시장 규모가 계속 확대되고 있는 커피메이커를
비롯, 모발건조기(헤어드라이어)와 토스터 시장에서도 대대적인 광고전을
펴면서 한국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이처럼 외국 업체들이 국내 소형가전 시장을 휩쓸고 있는건 가격보다
브랜드를 중시하는 국내 소비자들의 소형제품 구매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이에 따라 국내 중소전문업체 제품을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으로
납품받아 판매해 온 LG 삼성 대우 등 대형 가전업체들은 소형가전 분야를
사실상 포기하다시피 하고 있는 상태다.

LG전자 관계자는 "전기면도기 헤어드라이어 등의 경우 브라운 마쓰시타
등 외국 업체들의 기술 수준이 워낙 뛰어나 경쟁이 쉽지 않은 상태"라며
"멀티미디어 등 첨단 제품개발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소형가전에
신경을 쓸 여력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아예 외국산 제품의 수입 판매에만 치중하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올들어 아남전자가 마쓰시타와 판매 제휴를 확대해 본격 수입 판매에
나선게 단적인 예다.

문제는 이같은 외국업체들의 공세가 소형가전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WTO(세계무역기구)협정에 따라 대형 가전제품들에 대해서까지 전면 수입
개방조치가 시작될 98년 이후 소형가전은 물론 TV 냉장고 세탁기 등 대형
가전 분야에서도 이들 외국업체들의 대한공세에 불이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로 필립스의 경우 소형가전 분야에서 얻은 브랜드 네임을 바탕으로
최근 와이드TV 등 대형가전쪽으로까지 대한공략의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전자공업진흥회 이우종상무는 "소형가전 시장은 앞으로 본격화될 무한개방
시대에 한국 전자업체들이 안방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인지를 가늠케 하는
시금석"이라며 "국내 전문업체들에 대한 기술 및 디자인 개발 지원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학영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