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용 밸브를 생산하는 중견기업 S사는 지난해 사장을 공채했다가 큰
낭패를 봤다.

사연은 이렇다.

S사 소유주인 A씨는 작년초 업계에 한창 붐이 일던 사장공채를 시도했다.

경영에 특별히 문제가 있었던건 아니지만 회사를 좀더 키워볼 요량으로
최고경영자를 모집한 것.

1백여명의 응모자중 서류심사와 면접을 통해 최종 합격자로 Q씨를 낙점
했다.

국내 굴지의 H,S그룹 계열사 사장을 번갈아 역임한 그의 화려한 경력이
눈에 쏙 들어왔기 때문.

그러나 회사경영을 Q씨에게 맡긴 A씨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Q씨는 도대체 경영에 열심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큰 회사 출신인 Q씨는 S사의 경영을 "소꿉장난"정도로 보는듯 했다.

그래선지 Q씨는 웬만한 결재서류는 읽지도 않았다.

임원들이나 직원들과도 어울리지 못했다.

결국 조직에 금이 갔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싱가포르에 내보낸 수출품에
대량 하자가 발생해 클레임이 걸렸다.

A씨는 결국 채용 6개월만에 Q씨를 해고했다.

대기업 임원 출신으로 작년초 T사의 공채를 통해 사장이 됐던 K씨는 입사
3개월만에 사표를 썼다.

회사 오너인 B씨의 독단에 더이상 회사를 경영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B씨는 당초 K씨에게 경영권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K씨가 의욕을 갖고 추진하려던 발탁인사등 경영혁신 방안은 며칠 검토
하다가 휴지통에 던져졌다.

K씨는 "경영문화의 두터운 벽"만을 확인하고 씁쓸한 마음으로 T사의 문을
나올수 밖에 없었다.

최근 2년새 중소.중견기업들이 전문경영인을 공채하는 사례가 늘면서
"공채 사장제"가 재계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사장공채가 한국의 오너식 경영풍토에서 과연 뿌리내릴 수 있을지 여부가
초점이다.

사실 공채사장 Q씨와 K씨의 경우는 "최악의 시나리오"들이다.

공채사장 본인이 새로운 조직에 적응을 못했거나 기업주가 공채사장을
끌어안지 못한 극단적 케이스다.

반면 사장공채로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기업들도 적지 않다.

따라서 아직 공채사장제의 성공여부를 속단하기는 이르다.

어쨌든 공채사장의 정착여부는 한국기업의 소유.경영분리에 시금석이
된다는 점에서 재계는 주목하고 있다.

사장공채가 업계에서 화제가 된 건 지난 94년 2월 대웅제약이 사장을
공개채용하겠다고 신문에 광고를 낸뒤 서치영한국IBM전무를 뽑으면서부터다.

이후 동신제약이 박익규전동일제강 상무를, 거평그룹이 대한중석 사장에
양수제전삼성전자 부사장을, 청구그룹이 주택사장에 황성열전유원건설사장,
종합조정실 사장에 이수완전삼성그룹비서실장등을 각각 채용하는등 사장
공채는 마치 유행처럼 번졌다.

전문경영인 공채가 이처럼 줄을 잇는 것은 이 제도의 장점과 신흥 중견
기업의 필요가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장공채는 신흥기업 입장에서 전문경영자를 "최소 비용"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게 최고의 메리트"(거평그룹 인사담당 L상무)이다.

이미 경영능력을 "검증받은" 고급인력을 그대로 모셔오는 것이어서다.

더구나 공채는 영입과 달리 절차가 "투명하다"는 매력도 있다.

이뿐 아니다.

나산그룹 J사장은 "공채된 임원은 기존의 조직에 새살을 접목시키는
셈이어서 자연스레 기업변신의 계기가 된다.

특히 대기업의 경영시스템을 쉽게 도입하는 지름길"이란 점을 든다.

기업 덩치를 급격히 불리고 있는 신흥기업 입장에서 보면 사장공채로
부실한 경영층도 보충하고 경영혁신의 전기도 마련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적지 않은 공채사장들은 실제로 이같은 기대를 충족시키고 있다.

대웅제약의 서사장은 취임직후 영업에 편중된 조직의 무게중심을 연구개발
쪽으로 옮기고 대부분 외부인사로 "21세기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등 경영
혁신면에서 성가를 올렸다는 평을 듣는다.

대한중석의 양사장도 취임후 자율경영 기반을 확실히 다져 오너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동신제약의 박사장도 취임이후 중역들에게 권한을 대폭 위임하는등 제약
업체의 보수적 경영관행을 뒤엎는 경영스타일을 보여줘 화제를 일으켰다.

"실패 케이스"로는 지난해 2월 하나로부엌의 사장으로 공채됐던 신동온씨
(전현대전자 임원)가 취임 6개월만에 사표를 낸 것이나 파스퇴르유업사장
으로 뽑혔던 박상규씨(전제일제당 전무)가 작년 11월 그만 둔 것등을 꼽을
수 있다.

공채사장제가 나름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명암이 엇갈리는 것은 크게
두가지 요인 때문이다.

대개 대기업 출신인 공채사장들이 상대적으로 작은 기업에서 얼마나 적응해
내느냐가 첫째다.

H기업의 공채사장 Y씨는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마음가짐으로 중견기업
사장을 했다간 실패하기 십상이다.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라야"하듯 중견기업 나름의 조직문화를 이해하고
적응하며 점진적으로 혁신해 나가려는 노력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는 사장을 공채한 기업 오너의 자세이다.

"기왕에 경영쇄신등을 위해 사장을 공채했다면 그의 능력을 1백%이상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기존의 관행에 집착하는등 오너가 아집을 부려선 사장공채의 효과를 거둘
수 없다"(LG경제연구원 이원흠경영실장)

재계관계자는 "사장공채는 기업의 소유.경영 분리추세에 따라 앞으로 더욱
활성화 될 예상"이라며 "공채사장들이 발 붙일 수 있는 경영풍토와 공채
사장 자신들의 적응 노력이 맞물릴때 이 제도가 비로소 자리를 잡을 것"
이라고 강조했다.

공채사장을 "이방인"이 아닌 "내 사람"으로 여기는 기업주의 자세와 사장
자신들의 착근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얘기다.

< 차병석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