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S그룹비서실의 A사장은 모 경제부처 Q국장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요지는 "협력업체 납품대금에 대한 현금결제를 올해도 계속해서
시행해달라"는 것.

Q국장은"정부가 경기양극화해소를 위해 중소기업의 경쟁력강화에 정책의
중점을 두고있는만큼 대기업들의 현금결제 등 중소기업지원 분위기가
확산될 수 있도록 S그룹이 "향도"가 돼달라"고 주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A그룹은 현금결제를 작년 1년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연간1천5백여원의 추가부담도 만만치않거니어와 "거래관행을 무시한체
혼자만 앞서가면 여력이 없는 곳은 어떻게 하느냐"는 다른그룹의 항의도
적지않았기 때문.

그러나 S그룹은 올해도 현금결제를 시행키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 그룹 B전무는 "총선등을 감안해 정부가 오죽 다급했으면 그런
메시지를 보내겠는가 싶어 현금결제를 연장키로 했으나 다른 그룹들에게
무어라고 설명을 해야할지 걱정"이라고 사정을 털어놓았다.

현대 삼성 선경 기아등 경기도에 주력사업장을 갖고 있는 대기업
비서실과 기조실은 작년말 경기도 고위관료로부터 "항의반.읍소반"의
전화를 받고 10억-20억원씩의 기금출연을 약속했다.

경기도는 "경남 대구 경북 광주 전남등의 신용보증기금에는 거액을
출연하면서 우리에겐 왜 한푼도 안주느냐"며"대기업들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내줄주 없겠느냐"고 "할당요청"을 했다.

지역신용보증기금은 해당지역 중소업체들을 위한 지급보증 전문기관으로
최근 각 자자체는 기협중앙회와 함께 정부와 대기업의 기금출연을 강력히
요청해 현대(경남) 삼성(광주 전남) LG(부산) 공기업인 포철(대구경북)
등이 연고지에 1백억원이상을 출연키로 한 것으로 알려지고있다.

사례는 또 있다.

현대그룹 종기실 K부사장은 최근 정부고위관료로부터"모종의 부탁"을
받고고민에 빠져있다.

정부관리는 부탁은 엉뚱하게도 "중소기업들이 대출을 쉽게 받을
수있도록 그룹계열사의 지급보증을 확대해달라"는 것.

대기업들은 이미 우량협력업체에 대해 지급보증을 해주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지보확대요청을 받아들여 재무구조가 부실하거나
신용도가 떨어지는 중소기업까지 지급보증을 서주다 보면 자칫"생돈"을
물어주는 상황이 발생, 대기업까지 흔들릴 수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따라서 "지보확대문제는 협력업체의 신용도 분석등 경제논리에 따라
이루어져한다"고 대기업관계자들은 강조한다.

물론 경기하강국면속에서 경영난 기술난 자금난 판매난 인력난 등
소위"5난"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는 1백50만 중소기업들의 경쟁력강화를
위해서는 대기업이 도움이 필요하다는데 이견이 없다.

"대기업은 우리경제의 견인차고 중소기업은 그 뿌리에 해당한다.

대기업이 중소기업 지원에 적극 나서달라"는 김영삼 대통령의 주문이
아니더라도 대기업들은 무한경쟁시대에 살아남기위해 나름대도 중기기업에
대한 지원을 최대한 확대할 계획이라고 주장한다.

삼성그룹이 중기지원책으로 4번째로 중소유통제조업체에 대한 지원방안을,
LG전자가 협력업체의 글로벌경영을 지원하기위해 1천8백억원을 지원키로
하는 등 주요그룹들의 중기지원이 전방위지원으로 확대되고 있다.

총수들은 "중기의 성장없이는 대기업의 성장도 불가능하다"(정몽구
현대회장), "공존공영의 한솥밥정신"(이건희 삼성회장) 등을 강조하면서
중기지원문제를 직접챙기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정부는 총선등 정치시즌을 앞두고 정치논리에 바탕을 둔 온갖 중기
지원책을 봇물터지듯이 내놓고 있다.

대기업들은 이같은 정부의 움직임에 "화답"해야한다는 심적인 부담감을
최근들어 부쩍 느끼고 있다.

재계는 중기지원과 관련, 정부가 할일이 있고, 대기업의 역할이 각각
따로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나 지방정부가 해야할 일을 상당부분 대기업에게 떠넘기는
일이 많아져 해당기업들이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것.

당장 지역신보에 대한 기금출연만해도 일종의 준조세라는게 대기업들의
지적.

정부와 지자체의 재정으로 충당해야 할 일을 엉뚱하게 대기업들이
떠안았다는 주장이다.

오는 31일 김영삼 대통령과 30대그룹총수들과의 모처럼만의 청와대
만찬에서도 김대통령은 중기지원문제를 집중거론할 것으로 재계는 전망하고
있다.

"비자금사건등으로 의기소침해진 총수들을 다독거리는 측면도 있지만
임박한 총선을 고려,경기양극화해소를 위해 총수들이 중기지원에 적극
나서줄 것을 당부하고 싶은 것이 김대통령의 속내일 수 있다"(LG회장실
S전무)는게 기업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대기업들은 이제 중기지원방식도 개방경제체제등 새로운 환경변화에
맞춰 바뀌어야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중기가 무한경쟁시대에 살아남기위해서는 기존의자금지원외에 기술
경영지도 해외공동진출등 소프트웨어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어부(중소기업인)에게는 고기(자금)를 주는것도 필요하지만 고기를
잡는 방법을 일러주는 것이 더욱 긴요하다"(지승림 삼성비서실기획팀장)는
것.

자금지원은 가뭄끝의 단비처럼 당장은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회생가능성이없거나 자금대출을 받아 기술개발이나 설비투자보다는
무리한 사업다각화나 자기과시적인 일에 돈을 낭비하는 중소기업인에
지원을 해주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이라는 것.

또 대기업들은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위해서는 중기의 경영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내에서 지분참여비율(현행10%)을 확대하고 정부의
중기정책도 대기업과 계열관계에 있는 1차 협력업체보다는 91일이상의
어음결제가 지속되고 있는 2, 3차협력업체와 비계열중소기업에 초점을
맞추어야하다고 말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경기양극화가 문제가되고 있지만 중소기업간에도
계열협력업체와 비계열업체간의 경기양극화현상이 더 큰 문제라는게
대기업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정치시즌을 맞아 청와대와 경제부처가"중기바로세우기"로 고민하고
있지만, 재계도 정치권의 유무형의 메시지에 따른 각종"선심지원문제"로
마찬가지의 고심을 하고 있다.

<이의춘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30일자).